[대구 옛 이야기] 대구 의병장 우배선

입력 2020-01-15 18:00:00

김태훈 대구 영남중 교사
김태훈 대구 영남중 교사

화원현 월촌리에서 태어난 우배선(禹拜善·1569~1621)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걸쳐 100명가량의 의병을 이끌며 왜군에 맞서 항전했던 의병장이었다.

학업에 몰두하며 고향에서 생활을 이어가던 중, 1592년 5월 23일(양력, 이후 모든 날짜는 양력)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를 선봉장으로 앞세운 왜군 20만 명이 조선에 상륙하여 부산진과 동래성을 차례로 함락하고 파죽지세로 북상하였다. 왜군이 대구에 다다르자, 대구부사 윤현(尹晛)은 관민을 데리고 공산성으로 퇴각하였고, 드디어 왜군은 1592년 5월 31일 대구읍성을 점령하여 그들의 주둔지로 삼았다.

왜군의 침략으로 삽시간에 조선의 영토가 유린당하자, 우배선은 곧바로 비슬산 장수동에서 용맹하고 건강한 자 50여 명을 선발하여 의병부대로 편성함과 동시에 무기를 제작하고 군량을 확보해 군사훈련에 돌입하였다. 그는 1592년 7월 2일 화원현과 그 인근에 격문을 배포한 후 비슬산 아래 주요 길목, 낙동강변, 원월산 아래에서 왜군과 격전 끝에 수십 명씩 척살하였다.

1592년 9월 즈음에 그는 하빈현에서 초유사(招諭使· 난리가 발생했을 때, 백성을 타일러 경계하는 일을 맡았던 임시 벼슬) 김성일을 만나 그로부터 화원현 가장(假將·전쟁터에서 어느 장수의 자리가 부재했을 경우, 잠시 그 직무를 대신 맡았던 임시 장수)에 임명되었다. 이와 함께 그의 의병부대는 형식적으로 합천·성주 지역의 의병장 정인홍의 지휘하에 들어갔다.

우배선 의병진은 임진왜란 당시인 1592년 11월부터 12월까지 대구를 비롯하여 화원현 조암·감물천, 화원현 성평곡, 심천사·달천, 하빈현 마천현·이천·북면·서면, 현풍현 쌍산역, 화원현 성평동에서 왜군과 교전하여 군공을 세웠다. 1593년 1월부터 6월에 이르는 시기에도 대구뿐만 아니라 송림리, 화원현 감물천, 오동원, 화원현 월배·조암, 달성 등지에서 왜군과 격전을 펼쳐 전공을 거두었다.

이 과정에서 우배선은 의령 출신 의병장 곽재우를 만나 왜군 토벌 작전을 논의하였고, 진주성 전투에 참여하려다가 곽재우의 만류로 중단하기도 하였다. 한때는 경상우도 병사로부터 팔거현에 주둔한 왜군을 격퇴하기 위해 합동작전을 요청받았던 적도 있었다.

1597년 4월 7일에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우배선은 관찰사 이용순과 신녕 의병장 권응수와 합세하여 달성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고, 다음 해에도 성산·금호진·어느 강가에서 왜군을 물리쳤다. 왜군이 전쟁을 멈추고 철병을 감행하자, 우배선은 예하 의병들을 귀향시켜 생업에 종사하도록 조처하면서, 우배선의 의병투쟁은 끝을 맺었다.

우배선 의병진의 특징을 살펴보면, 우배선은 예하 부대에 별장들을 각각 임명하여 독립적인 전투 단위로 구성하였다. 또한 그는 병사들을 기병·보병·사수·창수·포수 등으로 편성하였고, 매복·추격·접전·야습·첩보 등의 다양한 전술을 구사하였다. 다만 우배선은 대구 다른 일부 지역에서 거병했던 의병부대와 연대하지 못한 채 거의 독자적으로 전투를 벌였다. 우배선 의병진은 대구와 청도의 접경지를 오가며 왜군의 주둔지를 공격하거나 그들의 이동경로를 차단하여 그들에게 적지 않은 피해를 입혔다. 이에 힘입어 정유재란이 마무리되자, 우배선은 선조에 의해 선무원종 일등공신에 책봉되었다.

대구시 달서구 상인동에 자리 잡은 월곡역사공원은 단양 우씨 문중에 의해 건립되었는데, 우배선을 기리는 낙동서원(洛東書院), 그가 낙향하여 학문을 강론했던 열락당(悅樂堂), 그의 동상 및 창의유적비, 파리장서비, 월곡역사박물관 등이 있다. 월곡역사박물관 안에는 그의 자료, 농기구와 생활용품, 단양 우씨를 대표하는 인물(파리장서운동에 참여한 우경동·우성동·우승기·우찬기·우하교·우하삼, 산남의진·대한광복회·주비단에서 활약했던 우재룡) 등이 전시되어 있다. 우배선을 비롯한 단양 우씨 문중에서 애국정신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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