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이미 정해져 있던 주인공

입력 2020-01-14 11:36:06

이응규 EG 뮤지컬 컴퍼니 대표

이응규 EG 뮤지컬 컴퍼니 대표
이응규 EG 뮤지컬 컴퍼니 대표

연습실 마룻바닥 위에는 대학생 배우들과 코칭 스태프들의 뮤지컬 연습이 한창이다. 낯선 이의 방문에 이목이 집중된 터라 총총걸음으로 연출석 테이블을 가로질러 구석에 잽싸게 자리를 잡는다.

끼와 흥으로 무장한 학생 배우들은 또래로 보이는 낯선 소년을 의식이나 한 듯 더 격렬한 춤사위로 자신의 재능을 뽐낸다. 과장된 몸짓과 노랫말로 대사를 주고받는 장르를 난생 처음 보게 된 소년은, 특유의 무뚝뚝함을 팔짱에 장착한 채 오그라드는 몸을 숨기느라 애꿎은 혀를 어금니로 깨무는 듯해 보인다. 스승은 소년에게 다가가 귀에다 대고 성악 발성으로 음가를 넣어 조용히 한마디 거든다. "중요한 대사는 노래로 해야 해. 왜냐면 이건 뮤지컬이니까~"

"웩!"

처음으로 소년에게 주어진 일은, 소리가 나는 장비를 조작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Sound Operator이다. 이 일은 배우들의 대사에 따라 음악을 재생하는 아주 단순한 노동이지만 연습 내내 콘솔 옆에 죽치고 앉아있어야 하는 아주 곤욕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연습이 없는 오전 시간에는 무대 제작 일을, 연습을 마친 늦은 밤에는 로드 매니저 일을 병행하며 뮤지컬 공연 외적인 일들까지 맡아 오고 있다. 소년은 늘 소망한다. 주인공들을 보조하는 삶이 빨리 끝나기를.

그토록 기다린 공연 날이다. 한치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는 긴장 속에서 배우들의 숨소리에 귀 기울여 음악을 재생하다 보니 100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이다. 커튼콜을 마친 배우들이 무대를 빠져나가는 순간 긴장이 풀린 듯 소년은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손바닥에 맺힌 땀을 털어낸다. 더 이상 무대 세트 가시에 찔리는 일도, 하루 종일 죽치고 앉아 노래를 트는 일도, 배우들을 집에 태워다 주는 일도 소년에게는 추억이 되어버린 감격스러운 순간이다.

공연이 끝남과 동시에 객석에 불이 밝혀지자 갑자기 1천여 명의 관객들이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 소년에게 일제히 줄을 지어 다가온다. 당황스러운 소년은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려보는데 느낌이 예사롭지 않다. 아니나 다를까 관객들이 그에게 다가와 한마디씩 건네며 객석 밖으로 유유히 사라진다.

"정말 멋진 음악 재생 능력이예요!" , "당신의 견고한 못질로 세트가 넘어지지 않았군요"

이 일만 끝나면 스승을 떠나 소년 자신의 인생에 주인공이 되려고 마음 먹었었다. 하지만 아무도 없는 무대 세트 제작실에서 혼자 안무 동작을 따라 하고, 주인공을 바래다 주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마치 주인공이라도 된 듯 목놓아 노래를 부르며, 배우들의 호흡에 맞춰 스페이스바를 누르며 기뻐했던 소년은 이미 정해져 있던 주인공이었을지도 모른다.

쏟아지는 환청에 어안이 벙벙하다. 마치 오케스트라 마에스트로가 된 것만 같은 소년은 우아하고 기품 있는 자세로 남은 한 곡을 향해 스페이스바를 누르며 외친다.

"Exit Music, 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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