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 때부터 손으로 만든 호미…미국인들도 품질에 반했다
대장간은 쇠를 달궈 호미나 낫, 쇠스랑 등 농기구나 연장을 만드는 곳이다. 이를 업으로 삼는 사람을 대장장이라고 부른다. 대장장이 석노기(66·경북 영주시 구성로) 영주대장간 대표는 오늘도 불이 활활 타오르는 화덕 앞에서 망치로 쇠를 두드린다. 시뻘건 쇠뭉치를 요리조리 뒤집어가며 연신 망치질을 하며 찬물에 식히길 여러 차례. 볼품 없던 쇠는 어느새 날렵한 호미로 변신했다. 한국의 호미를 세계에 널리 알린 장인이기도 한 석 대표는 오늘도 망치로 달궈진 쇠를 두드려 호미 날을 다듬고 있다. 1968년 14세에 대장간과 인연을 맺기 시작해 올해로 53년째다.
◆50여 년 대장장이 삶
석노기 대표의 대장장이 인생은 196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충남 논산에서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난 석 대표는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매형 대장간에 들어갔다. "초등학교도 간신히 졸업한 터라 진학은 꿈도 못 꿨다. 마침 대장간을 경영하는 매형이 거들어달라길래 입에 풀칠도 할 겸 해서 시작하게 된 것이 평생 직업이 됐다"고 말했다.
매형은 석 대표를 먹이고 입히고 재워 주었으며, 간간이 기술도 가르쳐줬다. 처음엔 심부름을 하거나 풀무로 불 피우는 게 고작이었다. 차츰 어깨너머로 대장간 일을 배워 나갔다. 2년쯤 지났을 때 매형이 말했다. "공주의 한 대장간에서 사람을 구한다는데, 그곳에서 기술을 배워 보라"며 권했다. 매출이 그다지 많지 않았던 매형은 처남에게 월급을 챙겨 주지 못하는 걸 미안해하던 참이었다.
공주의 대장간은 규모도 제법 컸다. 하루에 서너 시간씩 자면서 열심히 기술을 익혔다. 주인도 악착같이 기술을 배우려는 석 대표에게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려고 했다. 덕분에 3년 만에 웬만한 기술은 다 익혔다. "당시 월급이 500원이었는데, 집안 사정을 아는지라 모두 부모님에 보냈다. 철이 일찍 들어나봐요."
1973년, 경북 예천서 대장간 일을 하고 있던 매형이 그곳으로 오라고 했다. "여러 곳에서 스카우트 제의도 많이 받았지만 매형이 있는 예천으로 갔다. 그만큼 매형을 신뢰했다"고 했다.
매형과 잠시 일하다 1975년 현재의 자리에 '영주 대장간'이란 간판을 걸었다. 밤낮으로 열심히 일했다. "작은 대장간 차리는게 소원이었다. 어렵게 마련한 만큼 죽기 살기로 일했다"고 했다.
고비도 있었다. 주위에 대장간이 서너 개나 들어섰다. 또 값싼 중국산 제품이 들어왔다. 경쟁이 치열해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 석 대표가 찾은 답은 좋은 제품을 만들고 끝까지 책임지는 것. 자신이 만든 제품이 수명이 다할 때까지 100% 애프터서비스를 해줬다. "제가 만든 물건은 수명이 다할 때까지 애프터서비스를 다해준다. 2년 전 세계적인 인터넷 쇼핑몰인 아마존에서 호미가 팔리며 소문이 많이 났지만, 그게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일은 아니다"고 했다.
석 대표는 호미를 용도에 맞게 제작한다. 사용자가 원하는 형태를 주문받아 만들어 주기도 한다. 재료는 차량용 스프링이다. 일명 '판 스프링'이라 불리는 쇳덩이로 호미를 만든다. 석 대표는 판스프링을 가져오면 호미 크기에 맞춰 사각형으로 자른다. 그러고 사각형 쇳덩어리를 가마 불에 넣었다가 빼내 두드리고, 다시 불에 넣었다가 빼내 두드린다. 호미 형태가 잡히면 겉면을 가공해 매끈하게 만든 뒤 나무 손잡이를 끼운다. 석 대표는 "차량용 스프링은 재질 자체가 견고해 호미 재료로 제격"이라고 했다.
제작 방법도 전통 방식을 고집한다. 쇠 자르기와 초벌 메질만 기계로 할 뿐 형태를 잡고 날을 세우고 손잡이 다는 것까지 전부 수작업이다. 쇳덩이를 가마 불에 집어넣었다가 꺼내 망치로 두드리고, 또다시 불에 달구어 메질한다. 하루에 육십 자루 정도 만든다. 석 대표는 "영주대장간 호미의 인기비결은 손으로 다 만들기 때문에 중국산 등 다른 호미보다 날이 정교하고, 튼튼하다는 점"이라고 했다.
석 대표가 만든 농기구는 강원도, 경기도, 경상도 뿐만 아니라 해외로도 팔려 나간다. "한번은 미국 LA에서 교포가 찾아와 '미국에선 한국 농기구처럼 원하는 각도로 휘어지거나 날카로운 삽을 구하지 못한다'면서 호미,낫 등 수십 개를 사갔다. 해외에 나갈 때 선물용으로 구입하려 찾아오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고 했다.
2008년 화마로 훼손된 숭례문 복원 때도 석 대표의 재능은 유감없이 발휘됐다. 불이 난 화재현장에서 '숭례문대장간'을 임시로 차린 석 대표는 나무에 박는 대못을 제작했다. "국보1호 복원에 힘을 보탤 수 있어 뿌듯하다"고 했다.
석 대표는 '영주대장간'을 상표 등록했고, 인터넷 판매를 시작했다. 그중 호미는 미국 온라인 쇼핑몰 '아마존'에서 판매 순위 10위권에 들어 화제를 모았다. 물건을 구매한 사람들의 호평도 이어졌다. 아쉬운 건 주문은 밀려오는데 제작이 따라주지 못한다는 것. 영주 대장간에서 매일 일하는 사람은 석 대표뿐다. 대장장이로 이끌어 준 매형과 일꾼 1, 2명이 돕지만 늘 일손이 부족한 편이다. 매형 천봉재(79) 씨는 "처남은 어릴 때부터 성실했고, 소질도 있었다. 이만하면 성공한 것 같아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석 대표의 오른손 손가락은 호미 날처럼 마디가 구부러져 있다. 오랫동안 집게나 망치 같은 도구를 잡고 메질을 하다보니 손가락이 이에 맞춰 구부러져 버린 것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석 대표는 행복하다고 했다."열네 살에 고향 떠날 때, 공장 하나 갖는 게 꿈이었다. 지금 다 이뤘다"며 크게 웃었다.

◆아마존에서 대박난 '영주대장간 호미'
석 대표가 만든 호미는 미국 온라인 쇼핑 사이트 '아마존'에서 대박을 터트렸다. 꽃삽만 쓰던 미국인들에게 ㄱ자로 꺾어진 '호미'는 '혁명적 원예 용품'으로 '덤불 베는 데 최고'라는 구매평이 이어지면서 주문이 쇄도한 것이다. 국내에서 6천원 가량인 호미가 국내보다 몇 배로 비싸게 팔렸다. 최근에는 미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구매 문의가 이어지고 있어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석 대표는 "내가 만든 호미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데 큰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다.
◆"대장간 이을 사람이 없다"
14살 때부터 대장장이 생활을 시작한 석 대표는 후계자를 찾고 있지만 아직 마땅한 이를 찾지 못하고 있다. "후계자 양성을 하고 싶어도 하겠다는 젊은이가 없다"고 했다. 큰아들에게도 넌지시 속을 떠보았지만 고개를 저었다고 했다. 그동안 몇몇 젊은이가 찾아왔지만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떠났다. 석 대표는 "한 젊은 친구는 일을 시작한 지 1시간 만에 도망간 적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 당분간은 매형과 대장간을 꾸려나갈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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