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책]다시(茶詩)를 드십시오

입력 2020-01-04 06:30:00

오영환 시조집 『사질토 분청 찻잔』(학이사, 2019)

연잎차
연잎차

누군가를 만나려고 할 때 '차 한잔하자'고 한다. 책을 한 권 손에 들면서 우리는 찻잔을 함께 든다. 사람으로 사람을 만날 때, 책으로 세상을 만날 때 우리는 왜 차를 대동하는 것일까. 마음 문을 열고 진리를 향해 가는 길에, 차는 그보다 좋은 이 없을 참 도반이 되기 때문이다.

차나 한 잔 드시게
그냥 들면 되나요
꽉 찬 의문 차 마시茶
제풀에 풀리듯이
가게나
차 맛 속으로
저 안에 나我 있는가
「끽다거喫茶去」 전문

『사질토 분청 찻잔』은 시인이자 다인(茶人) 오영환이 등단 20년 만에 출간한 첫 시집이다. 읍을 하듯 정성스럽게 독자들에게 올리는 이 한 권의 시집은 마치 오랜 행다(行茶)의 과정 후 나온 오롯한 한 잔의 차와 같다. '내 시는 물을 끓여 식히고 우려내어/차 한 잔 목구멍으로 삼키듯이 푸는 거다'(서시 「茶」 중에서)라고 했듯이 말이다. 1999년 현대시조 신인상 수상 이후 기나긴 수행의 심호흡과 굴신(屈身)으로 기운을 모아 드디어 일보(一步)를 딛었기에, 오영환의 시집은 그 호흡의 길이와 무게감이 엄청나다. 그의 시 한 수를 읽다 보면 한 줄 한 줄 행간의 호흡이 상당히 길다는 것을 느낀다. 바쁜 일상 속에서 흘깃 읽어서는 그 시의 맛을 전혀 알 수가 없다. 마치 너무 급해 뜨거운 차가 무미(無味)한 것처럼, 혹은 바빠서 못다 마시고 두었다 식어버린 차가 고삽미(苦澁味)만 남은 것처럼, 제 맛을 잃어버린다. 그의 시는 한 잔의 차 같아서 마음의 온도를 맞추고 마음이 넘치지 않을 때 그 색, 향, 미를 제대로 음미할 수가 있다.

엄지만 한
찻잔에 한가로운 마음 줄기
온 숨이
멈춰 서서 어린 살결 설레는
젖빛 향
운무 서리어 적막에 들고 있다
「차·1」 전문

시집 『사질토 분청 찻잔』은 서시와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무심차'에는 백차, 진여금차(眞如金茶) 등 차를 소재로 한 시 16편이 담겨있다. 2장 '차 만나러 가는 길'에는 차와 관련된 삶과 인연에 대한 시 15편이 수록되어 있다. 깨진 사질토 분청 찻잔을 만난 사연, 찻그릇에 비유한 어머니에 대한 정, 차를 만드는 과정 등 다인의 삶이 그려져 있다. 3장 '비움에 대하여'에서는 비움과 하심(下心)과 행보(行步)에 대한 이야기들, 수행의 과정에서 얻은 명철과 통찰이 담겨 있다. 4장 '행주를 삶으며'에서는 시인, 다인으로서의 삶을 지탱하는 바탕의 자아인 여성으로서, 어머니로서의 삶이 배어 있다.
전반적으로 다향이 가득하고 깊이가 있어 청소년들에게 읽히기에는 난해한 감수성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중학교 인성센터에서 근무하는 필자는 학생들과 함께 분주한 아침을 시 한 수로 열어보려 했지만, 그날은 마음이 급하고 떠있었던 것일까. 조용히 혼자 앉아 다시 읽다 보니 시구(詩句) 곳곳에 도전이고 가르침이다.

어린순을 따면서 마음으로 묻는다
뜨거운 불과 물을 견딜 수 있겠는가
「차를 만들며」 중에서

배움의 자리는 비단 청소년의 자리만은 아닐 것이다. 달려가는 청년들에게도, 여전히 청년 정신으로 가득한 우리네 부모님들 마음에도, 세대를 아울러 이 한 권의 시집이 주는 여운과 내면세계의 고요함은 우리에게 울림 있는 가르침을 준다.

온갖 자리
내려놓고
바라보는 창 아래

키 낮은 들꽃 무리
말없이 나를 본다

가을 든
고운 이파리
제 발등을 덮는 오후
「하심창下心窓」 전문

이 시집은 반드시 시간을 두고 음미하실 것을 권해드린다. 마음이 차분하고 고요하게 되어 선정(禪定)으로 인도받으실 터이다.

김서윤(학이사독서아카데미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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