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이제 그만 옥상에서 내려오시기 바랍니다

입력 2020-01-01 17:03:42 수정 2020-01-01 18:49:57

29일 영남대의료원 건물 옥상에서 고공농성 중인 해고노동자를 응원하기 위해 부산에서 대구까지 100km를 도보 행진한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왼쪽에서 두 번째)이 농성 중인 박문진 씨를 찾아 눈물을 흘리고 있다. 성일권 기자 sungig@imaeil.com
29일 영남대의료원 건물 옥상에서 고공농성 중인 해고노동자를 응원하기 위해 부산에서 대구까지 100km를 도보 행진한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왼쪽에서 두 번째)이 농성 중인 박문진 씨를 찾아 눈물을 흘리고 있다. 성일권 기자 sungig@imaeil.com
이석수 선임기자
이석수 선임기자

의료를 담당하는 기자가 영남대병원을 갈 때마다 보기 불편한 모습이 있다. 본관 1층에 들어서면 대형 매트 2장을 붙인 자리를 깔고 초록색 조끼를 입은 사람이 앉아 있다. 뒤편 대형 안내판엔 '영대의료원 해고자 고공농성 및 로비농성 돌입'이라고 씌어 있다. 건물 기둥과 벽면 곳곳에도 붉은 글씨로 '노조파괴 진상규명 해고자 원직복직' 등의 투쟁 구호들을 붙여 놓았다.

하루 수천 명에 이르는 환자와 보호자들은 병원 건물 안 농성장을 비켜 지나가면서 어떤 생각을 할까? 무려 반년(半年) 이상 계속되는 시위를 보며 노사 간에 엄청난 갈등이 있겠거니, 혹은 병원이 큰 잘못을 한 것으로 짐작을 한다.

하지만 병원 로비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영남대병원 소속이 아니다. 민주노총 산하 여러 산별노조 조합원들이 돌아가면서 영남대병원으로 '출근'하고 있다. 휴일 밤에도 이불을 펴 놓고 자면서 24시간 점거하고 있다. 새해 첫날로 185일째가 됐다.

제각기 다른 회사의 직원들이 남의 직장에 들어앉아 있는 희한한 점거 농성을 보면서도 병원은 그야말로 속수무책이다. 112 신고를 하고 경찰서에 집회 중지 요청 공문을 보내도 순찰차가 와서 한 번 보고 갈 뿐이다. 명백한 불법임에도 치안 공권력조차 어찌하지 못하는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영남대병원은 지난해 7월 1일부터 시작된 시민단체들의 기자회견, 각종 노조 결의대회나 총파업대회 후 본관까지 행진, 여러 집회 등으로 만신창이가 됐다. 특히 호흡기센터 앞에서 수차례 벌인 대규모 집회는 몸 아픈 환자에 대한 배려조차 없었다.

영남대병원에 대한 노동계의 '실력 행사'는 지난여름 해고 간호사 2명이 병원 옥상에 올라가 원직 복직을 요구하면서 시작됐다. 세 계절이 바뀌는 동안 1명은 옥상에 계속 머물고 있다. 두 해고 간호사는 지난 2006년 291일간의 불법파업을 이끌어 파면을 당했다. 이는 대법원까지 가서 정당한 해고임이 확정된 사안이다.

노조 측은 당시 병원이 컨설팅사를 통한 노조 기획 탄압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1천 명에 가까운 노조원이 압박에 의해 대거 이탈해 노조가 붕괴됐다는 것. 하지만 2012년 고용노동청 국정감사에서 문제가 제기됐지만 부당노동행위 사실을 밝혀낼 수 없었다.

당시 10개월 가까운 파업으로 병원 문을 닫을지 모르는 절박한 상황에서 어쩌면 서로 세련되지 못한 접근은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무려 13년이나 지나서 "복직시켜 달라"며 대법원이 확정한 판결을 뒤엎겠다는 시도는 법치주의의 근간을 흔들 뿐이다.

지난 세월 노동운동은 근로자의 권익을 지켜주는 큰 역할을 해왔다. 옥상에 계신 분의 표현대로 이제는 의사들이 시키는 담배 심부름을 거절할 줄 알게 됐고, '미스 리'에서 '선생님' 호칭도 얻었다. 지금은 간호사들이 병원을 이직할까 봐 걱정하는 시대가 됐다.

과거 억압과 불평등의 구조 속에서 '을'을 위한 노동운동은 대중적 지지를 받았지만, 노동단체가 거대 세력으로 정치 지향성을 나타내고 '갑'으로 군림하려는 태도는 시민들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밖에 없다. 현재 영남대병원 노조원이 전체 구성원의 0.5%밖에 안 되는 현실도 이와 무관치 않다고 말하는 직원들이 많다.

다행히 노·사·정이 함께하는 사적 조정이 이어지고 있다. 지금까지 7차례 조정을 거치면서 중재안이 어느 정도 가닥을 잡아간다는 얘기가 들린다. 서로의 명분을 살려주는 현명한 사회적 대타협을 수용하길 기대한다. 공공재인 병원을 투쟁의 공간으로 마냥 둘 수는 없지 않는가. 국민 건강추구권이 침해당해선 안 된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