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주의 잉여현실] 이야기가 있는 겨울밤

입력 2019-12-16 18:00:00

이은주 힐링드라마아트센터 대표, 심리치료사
이은주 힐링드라마아트센터 대표, 심리치료사

이야기가 울리는 방은 마법의 공간이다. 신화와 전설과 삶의 이야기들은 우리의 상상력과 마음과 영혼을 키운다. 긴 겨울밤이면 어린 시절, 할머니는 수많은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셨다. 이야기귀신 이야기, 여우누이와 같은 전래동화와 삼국지 이야기, 설화와 전설과 민담들. 여우누이 이야기에서 할머니의 여우 울음소리가 너무 무서워 "제발 그냥 말하듯이 이야기해줘!" 하곤 했었다.

그중 기억에 남는 것은 할머니가 살아온 이야기들이었다. 혼자 일본으로 건너갔던 일, 태풍이 불어 양철 지붕에 목이 날아간 이웃집 여자 이야기들. 나는 이야기에 취해 방 밖의 찬바람과 어둠 속 귀신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야기 속에서 하늘과 땅과 사람들의 삶은 연결되어 하나이고, 죽음도 두려운 일이 아니었다. 모든 만물에 영혼이 깃들어 있음을 저절로 알게 되었고, 그때 온 평화가 지금까지 나에게 있다.

문자로 읽는 독서가 아니라 소리의 울림이 있는 이야기는 우리의 마음을 다정하고 편안하게 한다. 안전한 공간에서 삶과 죽음과 배반과 복수, 폭력과 파괴의 이야기들은 아직 다가오지 않은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준다. 게다가 친밀한 사람의 목소리를 통해 들려지는 이야기는, 작은 방 안에서 마을과 세상 밖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지금 여기 이전의 인연의 세계로 이끌며, 현실 저 너머의 세계, 잉여현실의 세계로 듣는 이들을 데려간다. 숨결을 통해 울리는 소리의 진동과 음성의 고저와 장단은 리듬을 만들어낸다. 숨결과 리듬에 얹힌 이야기는 그냥 이야기가 아니라 의식과 감정의 세계, 그 아래 그림자 진 욕망과 얼어붙은 감각들을 어루만지고 살아나게 한다.

많은 어른들은 아이들이 책을 읽으면 지식도 쌓이고 간접 경험을 해 인성도 좋아질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별로 그렇지 않다. 찬바람이 마른 나뭇가지를 부러뜨리는 으스스한 밤이면, 이불 속에 다리를 묻고 둘러앉아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시라. 특히 불안과 두려움이 많은 아이들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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