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 김천과 철도

입력 2019-11-25 06:30:00

조향래 논설위원
조향래 논설위원

조선 중종 때 대제학까지 지낸 묵계 강혼은 경상감사로 지방을 순행하다 성주 관기 은대선과 각별한 정이 들었다. 작별이 아쉬웠던 두 사람은 김천 부상역까지 올라가 애틋한 밤을 함께 보냈다. 강혼이 그날의 정취와 정념을 '부상역춘야(春夜)'라는 시로 남겼는데 그 내용이 농염하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도 김천도역 찰방으로 부임했다가 당쟁에 휘말리는 바람에 관직을 포기하고 팔도 유람에 나섰다.

그렇게 실의와 좌절의 방랑길 끝에 탄생한 것이 '택리지'라는 인문지리서이다. 김천 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사모바위' 얘기도 김천역과 관련이 있다. 용두산(모암산) 위에 사모(관복 입을 때 쓰는 모자) 형상의 바위가 있어 과거 급제자가 많았다. 자연히 고관대작들의 고향 나들이가 잦아 역리들의 고초가 심하자 그 바위를 떨어트려 버렸다는 것이다. 이렇게 김천의 내력에서 역(驛)을 빼면 임자 없는 명월이 된다.

고려시대부터 김천역, 부상역, 작내역, 장곡역 등이 등장했으며, 조선 초기 역참제 정비에 따라 김천역은 20여 개의 속역을 관장하는 도역(道驛)으로 부상했다. 중심 역인 도역에는 종6품 관리인 찰방이 부임해 역무를 관장했던 까닭에 김천에는 '찰방골'이라는 지명도 생겨났다. 퇴역한 역마들을 모아 연자방아를 돌리게 했다는 '뒷방마'도 역에서 비롯된 마을 이름이다.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한반도 남부 중앙에 위치한 김천은 사통팔달 교통의 중심지로 더욱 발전하게 된다. 역촌(驛村)의 생성과 함께 시장이 형성되면서 김천시장은 전국의 5대 시장으로 번성했다. 삼도봉(三道峯) 자락의 김천은 경상·전라·충청 3도 특산물과 남해안의 해산물이 집결하는 백화점이었다. 김천의 철도와 역 특수는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위축되었다.

KTX 시대를 맞이한 김천은 혁신도시 유치와 더불어 재도약의 꿈을 키우고 있다. 이 또한 철도와 역의 역사적인 배경 덕분이다. 김천과 철도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최근 김천시가 철도 관련 기업을 잇따라 유치하면서 철도산업의 메카로 다시 주목받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남해와 서해 쪽으로 철도 연결도 추진하고 있다. 역참(驛站)의 내력이 1천 년에 이르는 김천의 굴기(崛起)가 예사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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