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저들 삶의 단편, 냉소적 시각으로 담담하듯 유쾌하게 그려
'인생은, 그리고 세상살이는 복싱만큼 그리 단순하지 않다. (…) 살다 보면 맞아 줘야 할 때가 있고, 또 그렇다고 너무 티 나면 안 되니까 적절한 타이밍을 노려 혼신의 표정 연기와 더불어 쓰러져 줘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여기다 링 바닥에 누워 꼬랑지 내린 강아지 새끼처럼 실신한 척 한쪽 다리를 부르르 떨어주는 서비스까지 겸해 주면 더 좋아한다.'
말 뿐인 '세컨드 아웃' 후에도 여전히 세컨드가 복서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해 주는 링 위에서와 달리 많은 루저들은 세컨드조차 없는 채로 링 위에서 싸우는 삶을 지내고 있다.
아버지 같지 않은 아버지와 아들 같지 않은 아들. 두 루저가 인생을 걸고 마지막 한판 승부를 시작한다. '거지같은' 세상을 향해 예고 없는 펀치를 날리면서.
◆불구 된 조작 격투경기 선수, 잊고 살던 빅파파와의 사연으로 스타덤
열아홉 늦은 나이에 가출한 주인공 '고치원'은 10년 간 한 체육관에서 복싱을 배우고서 MMA(종합격투기) 선수로 전향했다. 그곳에서 '링 위의 간디' 또는 '징검다리'라는 이름으로 커리어를 쌓았다. 복싱선수 경력이 무색하게도 링 위에서 비폭력주의자처럼 시합하거나, 상대 선수의 다음 스테이지 진출을 돕는 돌다리 같대서였다.
그 후 현재 서른다섯살이 될 때까지 6년 간 치원은 '워크 경기'(조작 경기) 전문 격투기 선수로 활약했다. 그와 한 번 대결한 선수들은, 아마도 그 같은 선수가 되기 싫어서, 이 악물고 훈련해 챔피언이 되곤 했다. 큰 돈을 버는 생활은 아니었지만, 야금야금 잽을 휘두르다 보면 언젠가 KO를 낼 수 있는 피니시 펀치를 휘두를 기회가 온다고 믿었다.
사고는 불현듯 일어났다. 박천호 GFC 부대표의 제안으로 그에게 져 주는 조작 경기를 벌인 뒤 정신이 혼미한 시간을 보냈고, 문득 병실에서 깨어나 보니 교통사고를 당해 하반신 불구가 돼 버린 것.
병실에 누워 제대로 몸도 못 가누던 그에게 십수년 간 잊고 살았던 덩치 큰 아빠 고동석, 일명 '빅파파'가 찾아온다. 박천호가 치원과 빅파파를 다큐멘터리 방송에 내보내 주기로 했다는 말과 함께.
나이트클럽에서 손님들을 웃기는 '똥꼬쇼'를 벌이며 생활을 이어가던 빅파파도, 더 이상 진짜 KO펀치를 날릴 수 없게 된 치원에게도 이는 마지막 기회나 다름없었다. 다큐멘터리에조차 각본이 있다는 사실을 납득하지 못하던 빅파파, 그런 아버지에게 연기자의 '프로 정신'을 가르치며 부자 관계를 비즈니스적 관계로 재정립한 치원은 다큐 '사람 냄새' 첫 화가 방영된 이후 그들의 삶에 감동한 이들에게 '스타'로 등극한다. 그러나 촬영과 방송을 거듭할 수록, 실상은 그들 자신이 아니라 박천호를 더 큰 스타로 부각하는 장기말 역할만 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동정과 연민 배제한 냉소적 시선 끝 '써커 펀치' 날려
'빅파파'는 루저(주로 인생에서의 패배자를 이르는 말)들의 삶을 다룬 장편소설로, 특히 요즘 급증하는 '루저 남성'에 대한 이야기다. 안 웃긴 개그맨, 구독자 없는 인터넷방송 BJ, 1980년대에 사고가 머문 아버지. 이런 찌질한 사람들의 인생을 관찰자 시선, 냉소적 시각으로 다루면서 삶의 역설을 드러낸다.
각기 비참한 삶을 살아가던 부자가 아들의 사고를 계기로 재회하며 벌어지는 일들은 비극적이지만 비극이 아닌 것처럼 담담하게 서술된다. 슬픈 이야기를 슬프지 않게 풀어가는 이 소설의 힘은 작가와 주인공의 냉소적 태도에서 나온다. 자기 자신에게조차 연민을 갖지 않고 거리감을 두는 시선은 그보다 먼 어딘가에 희망이 있다는 기대감, 기대를 배신하는 절망 그 사이에서 끊임없이 줄타기한다.
이렇게 이어지는 냉소는 작품 말미 반전 아닌 반전을 통해 완성된다. 복싱에 빗대어 보면 경기가 끝난 후 상대가 방심했을 때 그에게 날리는 '써커 펀치'가 극중에서도 이뤄진다. 써커 펀치는 룰을 벗어난 것이고, 그래서 비열하다. 그럼에도 이것이 쾌감을 주는 건 룰 안에서 이길 수 없는 존재가 취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자, 룰을 교묘히 이용하려는 이들을 흔들어 놓을 수 있는 최후의 한 방이어서다.
작품 해설에서 채호석 문학평론가는 "가짜를 진짜처럼 살아야 하는 삶의 역설을 인식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때 그것을 견디는 힘, 그것이 냉소가 아닐까"라며 "소설은 눈물에서 오는 공감을 거부하고, 경기 '밖'을 보여주기에 웃음짓게 만들고 허탈하게 만든다"고 평했다.
소설은 상당히 쉽게 잘 읽힌다. 다만 루저 남성이 왜 양산되는지에 대한 역사적·분석적 인식이 부족한 점과, 기존의 '아버지 찾기 소설'이나 '남성 소설'과 차별점이 크지 않은 점은 아쉽다. 312쪽, 1만3천500원.
※ 최재영은 =
1992년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장편소설 '빅파파'로 제71회 '문학사상' 신인문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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