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숙의 옛그림 예찬]장승업(1843~1897) '녹수선경'

입력 2019-11-24 06:30:00

미술사 연구자

비단에 담채, 35.3×23.3㎝, 간송미술관 소장
비단에 담채, 35.3×23.3㎝, 간송미술관 소장

한 시대를 몇 명의 대가로 대표시키는 일은 미술 뿐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이루어지는 특정한 의미화지만 시간이 지나면 기억법으로 남는다. 한자문화권에서 널리 알려진 '대표 꼽기'로 당나라 한유 이후 송나라까지 8명을 모범으로 꼽아 그들의 문장을 보급한 '당송팔대가'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방식이 적용되어 고려부터 대한제국까지 '여한십가(麗韓十家)'를 꼽은 선집이 나왔다. 근래에 나온 『한국산문선』은 원효부터 정인보까지 명문 600여 편을 꼽았다.

땅이 넓고 미술의 역사가 오래며 미술 애호가도 많고 화가도 많은 중국에서는 한 시대를 호령한 화가를 숫자로 뭉뚱그리는 일이 자주 있었다. '원사대가', '사왕오운', '양주팔괴' 등이 얼른 떠오른다. 원사대가는 원나라 때 활동한 4명의 문인화가이고, 사왕오운은 4명의 왕씨(왕시민, 왕감, 왕원기, 왕휘)와 오씨(오력), 운씨(운격) 등 청나라 초기 6대가이다. 청나라 중기의 양주팔괴는 양주에서 그림을 팔아 생활했던 직업화가이다. 각기 독특한 개성을 발휘해 '8가'가 아닌 '8괴(怪)'로 불리게 되었다.

한 시대의 대가가 한 명일 때는 독보, 유일, 무쌍, 무비(無比), 전무금무(前無今無), 독왕독래(獨往獨來) 등으로, 두 명일 때는 쌍벽, 이대가(二大家), 양가(兩家) 등으로 부른다. 오원(吾園) 장승업은 조선 말기 화단의 원톱(one top)이었고, 이후 근대전환기 전통화단은 조석진과 안중식이 쌍벽이었다. 중국에서는 청나라 말 오창석과 제백석이 쌍벽을 이루었는데 오창석은 항주, 제백석은 북경에서 활동해 남오북제(南吳北齊)라고 했다. 남선북마(南船北馬)로 지리환경이 달랐듯 미술취향도 양자강 남쪽과 북쪽의 차이가 많았다.

대표 꼽기는 그 분야로 들어가는 길잡이다. 한국미술사에서도 조선회화를 통틀어 삼대가, 사대가를 들기도 하고, 호에 '원(園)'이 들어가는 삼원, 호에 '재(齋)'가 들어가는 삼재를 꼽기도 한다. 장승업은 삼대가, 사대가, 삼원에 모두 들어간다. 만약 괴짜 화가를 삼괴(怪)나 삼기(奇) 또는 삼광(狂)으로 꼽는다면 여기에도 빠지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그림 실력으로도, 남다른 개성으로도 특출한 화가이다.

장승업은 '조선 최후의 거장'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산수, 도석인물, 화훼영모, 기명절지 등을 다 잘 그렸다. 신선과 사슴을 그린 '녹수선경(鹿受仙經)'은 "사슴이 신선의 경전을 수업하다"라는 뜻이다. 송라가 늘어진 소나무 아래 사각 소반이 있고 펼쳐진 책과 향로가 놓여있다. 이 소반을 사이에 두고 뿔이 긴 수사슴과 짙은 색 옷의 신선이 마주하고 있다. 그런데 신선의 풍모라기엔 후줄근한 차림새에 헝클어진 머리칼, 수염이 듬성한 주름지고 넓적한 얼굴에 수심 낀 눈빛이 속인의 모습 같다. 심사정의 '선유도', 김홍도의 '포의풍류도'처럼 장승업의 자화상적인 이미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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