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여성 복지에 평생 헌신…경산 (사)나라얼연구소 기념사업 추진
1959년 한국 찾아 독신서약 봉사활동
영국 스코틀랜드 명문가 출신으로 23세 꽃다운 나이에 하느님의 뜻을 전도하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살겠다는 소명으로 한국땅을 밟아 이를 실천하며 평생을 바친 수산나 메리 영거(Susannah Mary Younger·83. 한국명 양수산나) 씨.
그가 한국에 온 지 다음달 8일이면 만 60년이 된다. 그를 최근 달성군의 한 식당에서 만났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여든이 넘은 할머니가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생기 넘치고 쾌활했다. 간혹 기억이 깜빡할때도 있지만 건강한 모습이었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명문가 출신이다. 아버지가 영국 국회의원과 외무부차관을, 남동생은 BBC 월드서비스 라디오 담당을 역임했다. 자신도 옥스포드대학교에서 PPE(철학· 정치· 경제학과)를 졸업한 재원이다.그의 외삼촌과 사촌오빠 2명이 한국전쟁이 참전해 한국에 대해 알고 있었다.
"한 모임에서 한국 유학생으로부터 한국에서 가톨릭 역사, 즉 많은 사람들이 온갖 박해 속에서도 가톨릭 신앙을 키워나갔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는데 참 인상적이었지요. 마침 천주교 대구대교구장이던 서정길 대주교가 한국에서 신앙을 전파할 평신도를 찾는다는 말을 듣고 한국행을 결심하게 됐어요."
그는 23살 때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 음악과에 줄 피아노 7대를 화물선에 싣고 5주간의 항해끝에 1959년 12월 부산에 도착했다. 독신 서약을 하고 사회안에서 선교활동 등 교구의 목적에 따라 교회에 봉사하는 사도직 협조자(아욱실리스타)로서 삶을 한국에서 시작했다.
그는 대구로 올라와 소외된 청소년과 여성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이들을 돌봐 주었다. 1962년 가톨릭여자기술원(현 가톨릭푸름터)를 설립한 뒤 여성들에게 미용 편물 등 기술을 가르쳐 이들을 당당한 사회인으로 자립하는데 많은 공헌을 했다. 대구의 사회복지, 특히 여성복지의 효시인 셈이다.
수산나 씨는 1964년 가난한 하양 주민들을 위해 먹거리와 일자리를 만들려고 무학산 중턱을 개간해 농장을 조성하려던 하양성당 이임춘 주임신부를 만나 이 일을 함께했다.
그는 영국의 구호단체인 옥스팜 등을 통해 후원금 받아 농장 조성 자금을 조달하고, 하양주민들이 이 농장에서 일하고 품값 대신 받는 옥수수가루 등 구호물품을 지원받아 무학농장을 운영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이 농장에는 옥수수와 감자 사료 작물을 심고, 유럽식 축사도 지어 가축들을 사육하는 등 하양주민들의 일터가 되었다.
"무학농장이 몇년 후 깡패와 결탁한 우유업체의 방해로 결국 문을 닫았지만 이 농장이 가난한 주민들의 생계유지를 했고, 매각자금이 무학중학교 운영과 무학고교 설립에 많은 도움을 주었으니 이 역시 하느님의 역사를 인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1973년 프랑스 루르드 '옥실리움 문화양성센터'로 파견돼 봉사를 하면서도 중간 중간 한국을 왕래했다. 2004년 은퇴 후에는 한국에서 여생을 마무리 하기 위해 대구에 정착했고, 특강과 영어회화 등 봉사활동을 하다 이제는 쉬고 있다.
"한국에서 활동을 후회해 본 적 없습니다. 한국이 외국으로부터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이렇게 빨리 외국에 원조를 하는 나라로, 해외에 봉사자를 파견할 정도로 엄청난 발전을 할 줄을 몰랐습니다. "
수산나 씨는 소외계층과 청소년 여성 복지에 일생을 바친 공로로 2011년 대구명예시민증을 받았다. 경산에서는 (사)나라얼연구소와 경산도시재생위원회가 공동으로 무학농장 조성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일자리와 먹거리를 제공하는데 기여한 수산나 여사의 정신을 널리 알리고 기념하는 공간 마련과 무학농장을 등록문화재로 등록을 추진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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