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녀석 고향이 어디지?" "경북 대구입니다." "대구란 게 어느 구석에 있냐 말야!" "부산에서 열차로 서너 시간가량 달리면 대구인데, 사과 생산지로 유명합니다."
대구 동촌면 입석동의 독립운동가 이갑상이 일본군 징병 제1기생으로 만삭의 아내와 헤어져 북지(北支·중국 만주)로 끌려가며 50명이 짐짝처럼 탄 4등 군용열차에서 일본인 하사관의 물음에 대답했다. 대륜중학교에 다니던 20세 외아들로 1944년 9월 20일 대구역을 떠나 용산역에 내려 '황군'(皇軍)이 되어 다시 열차로 사지(死地)로 가던 중이었다.
그는 세 차례 실패 뒤 1945년 2월 1일 탈출하나 3월 30일 잡혀 4월 28일 군법회의에서 징역 10년을 받아 서대문형무소 옥살이 중 광복으로 풀려났고, 1975년 회고록 '백의(白衣)의 향가(鄕歌)'에 대구 사과 사연을 남겼다. 이처럼 옛 대구는 사과로 통했는데 대구의 서양 사과 역사는 1899년 외국인 선교사가 남산동 동산병원 사택에 심은 때부터다. 우리 능금(林檎) 역사는 더 오래지만.
사과 재배에 적합한 대구는 좋은 돈벌이 터였음은 일본인 기록이 증명한다. 미와 조테츠는 1910년 '조선대구일반'이란 책에서 "대구에 와서(1903년 9월)…땅을 사자마자 곧바로 사과나무 5그루를 심었다. 나와 같은 해 혹은 그 이듬해부터 사과를 심는 일본인이 늘어나 지금은 대구의 대표적 산물이 됐다"고 했다. 가와이 아사오는 특히 1930년 '대구물어'에서 1904년부터 상업적 사과 재배에 나선 일본인 소개 뒤 일본인이 "대구 사과의 성가(聲價)를 올리는데 앞장섰음은 저명한 사실"이라 자찬했다. 1943년 대구부는 '대구부사'에서 "대구의 과수 재배는…능금의 산출액이 가장 많고, 대구 능금은 한국 내는 물론 일본 및 중국 쪽의 시장까지 진출했다"고 밝혔다.
대구 사과가 이랬으니 이갑상 대답은 그럴 만하다. 이런 대구 사과의 명성과 역사를 기리기 위해 지난 2일 대구 평광초등학교에서 '대구 사과 120주년 기념 역사 문화행사'가 열렸다. 행사를 연 최주원 광복소나무사랑모임 회장은 "대구에 '사과 역사문화체험관'을 만들기 위해 건립 추진위원회를 꾸리기로 했다"고 밝혀 관심이다. 옛날과 다르지만 대구 사과 명성을 이어가려는 평광동 사람의 활동이 부디 좋은 결과로 이어졌으면 하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