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예술의 기억] 대구가 품고 있는 이야기 하나

입력 2019-11-06 18:00:00

임언미 대구문화 편집장
임언미 대구문화 편집장

여기 한 장의 포스터가 있다. 파스텔 톤의 색 면을 여러 겹 겹친 화면 위에 빨간색과 파란색, 그리고 검은색 물감을 고루 사용한 글씨가 연주회 정보를 알려주고 있다. '대구현악회 창립 연주회, 현악합주, 편곡·지휘 이기홍, 특별출연 첼로 김경임, 바이올린 독주, 바이올린 이중협주, 찬조 출연 바리톤 이점희, 피아노 김경환, 일시 6월 2일, 장소 청구대학 대강당, 주최 대구음악가협회, 후원 일간신문사, 능인중·고등학교, 대구청년로타리클럽….' 이 포스터는 대구시립교향악단의 전신, 대구현악회의 창립 공연(1957. 6. 2) 때 사용된 것이다.

대구현악회 창립을 주도한 이기홍 지휘자의 증언에 따르면, 이 포스터는 당시 능인중학교 동료 교사였던 백태호 화백이 30장을 제작해 준 것이다. 당시 공연 홍보용으로 사용하고 이기홍 지휘자가 소장용으로 간직한 단 한 장이다.

이 포스터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궁금한 점이 생긴다. 1957년에 현악합주 연주회를 열었다는 것은 우리 지역에 합주를 할 만큼의 연주자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50년대가 어떤 시대인가. 해방 후 혼란기를 지나 6·25전쟁이 일어났고 대구는 직접적인 포탄의 피해는 입지 않았지만, 모두가 힘든 시절이었다. 그런 시대에 어떻게 이런 연주회가 가능했을까. 더군다나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 그리고 바리톤 협연까지.

한 사람씩 이름을 짚어가며 의문점을 풀어봤다. 대구현악회를 창단한 이기홍 지휘자는 영천 금호 출신으로 서울대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했다. 6·25전쟁과 함께 대구로 내려와, 대구로 피란 온 음악가들과 함께 교류하며 음악 활동을 했고, 레슨을 통해 바이올린 연주자들을 길러냈다. 어느 정도 연주자가 모이자, 합주 형태의 공연을 기획했고 여기에 가장 큰 힘을 보탠 사람이 바리톤 이점희 선생이다.

협연자로 이름 올린 이점희 선생은 이기홍 지휘자보다 열한 살이나 많았지만, '음악으로 대구 사회를 치유하자'는 데 뜻을 모은 음악 동지였다. 이점희 선생은 계성학교에서 박태준 선생의 영향으로 음악가의 꿈을 키웠고 계성학교 교사로, 지역 대학의 교수로 활동하며 음악가들을 길러냈다. 대구시립교향악단이 창단된 후 1970년대부터는 오페라운동에 몰입해 대구오페라협회, 대구오페라단을 거쳐 대구시립오페라단 창단을 위해 노력했다.

행사를 주최한 대구음악가협회는 어떤 단체였을까. 이점희 선생을 비롯한 음악인들이 1952년 대구음악연구회를 발족했고, 3회의 발표회를 연 후 1956년 대구음악가협회를 새롭게 조직했다. 당시 시대 분위기는 음악가들이 순수하게 음악만 할 수 없었던 시대였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모금을 해서 음악회를 열어 관객을 맞았다. 음악이 가진 힘을 믿었기 때문이다.

연주회 장소였던 청구대학(영남대학의 전신) 강당은 지금의 노보텔 자리에 있었다. 이곳은 연주회 장소가 부족했던 당대 예술가들에게 소중한 공간이었다. 공연장이라고는 공회당(현 콘서트하우스)과 키네마극장(현 CGV한일), 문화장 여관(현 금융결제원 자리) 정도가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다시 포스터의 이야기로 돌아오자. 백태호 화백의 유려한 필체로 제작된 이 포스터는 캘리그래피로 제작된 대한민국 최초의 연주회 포스터일 가능성이 높다. 이 포스터의 영향이었을까. 대구현악회 창립 연주회는 크게 호평을 받았고 그해 연말 대구교향악단의 창단을 이끌어냈고 1964년 대구시립교향악단이 창단됐다.

이제 포스터에 등장한 인물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지난해 연말 이기홍 지휘자가 세상을 떠남과 동시에, 안타깝게도 이 포스터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이제는 사진만으로 남아 있기에 이 포스터가 품고 있는 이야기가 더 소중하다. 더 늦기 전에 그 이야기를 세상 밖으로 꺼낼 준비를 마쳤다. 이 포스터를 모티프로 대구시와 지역방송이 다큐멘터리 '대구 음악 이야기'를 공동 제작했다. 오는 14일(목) 오후 11시, TBC대구방송에서 음악가들의 행적을 통해 대구라는 도시가 품고 있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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