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라언덕] 정치와 사랑

입력 2019-10-31 16:15:25 수정 2019-10-31 18:59:35

사회부 차장 이창환
사회부 차장 이창환

2006년 12월 중순 국회의사당 인근에서 지금은 고인이 된 이만섭 전 국회의장을 만났다. 8선 국회의원에다 입법부 수장을 두 차례나 지낸 그는 70대 중반의 나이에도 꼬장꼬장함이 묻어나는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햇병아리 정치부 기자에게 말했다. "정치와 사랑은 계산하면 안 된다." 사랑을 계산하지 말라는 얘기에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비상식이 판을 치는 현실 정치에서 유불리를 따지지 않으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언뜻 이해되지 않았다. "정치는 꾀가 아닌 가슴으로 해야 한다. 40년 정치를 하면서 계산해 본 적이 없다. 옳다고 생각하면 소신대로 해 왔고 신변 위협이나 개인의 불이익은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선거의 계절이 돌아왔다. 내년 4월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현역 국회의원이나 정치 지망생들은 공천을 받기 위해 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대구경북(TK) 공천 희망자들은 대부분 자유한국당 문을 두드리고 있다. 공천 관련 조그마한 소식에도 유불리 계산에 속이 타들어 간다. 현역 의원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 어차피 현역 의원 30~40%는 바뀔 수밖에 없어서다.

한국당에서 TK 의원들은 찬밥 신세에다 모래알이다. 과거 당내에 지역을 대표하는 중진 정치인이 있었고 그를 중심으로 TK의 목소리를 모았다. 공천 국면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강재섭 전 의원이 대표적이다. 가깝게는 유승민 의원, 최경환 전 의원 등이 나름 역할을 했다. 지금은 그야말로 각자도생(各自圖生) 상황이다.

중앙당 입장에서 TK는 가장 중요한 지역이면서 물갈이하기는 가장 손쉬운 지역이다. 이는 TK 정치권의 자업자득이다. 20대 국회에서 TK 의원이 소신 있게 자신의 목소리를 낸 경우는 드물었다. 탄핵 상황에서도 제 살기에 바빴다. 국면마다 유불리 계산에 몰두하는 기회주의적 처신이 드러날 뿐이었다. 지역 정서를 핑계로 몸 사리기를 하다 보니 정치적 영향력은 시간이 갈수록 추락하고 결국 중앙당 입맛에 따라 움직이는 평범한 정치인에 그치게 된다. 공천 국면에서 현역 의원들이 선수에 상관없이 중앙당 눈치를 보며 마음 졸이는 가장 큰 이유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앞으로 TK에서 큰 정치인이 나오기 매우 어렵다.

그나마 유승민 의원이 정치인다운 소신을 보여준다. 내년 총선에서 생사의 갈림길에 서겠지만 계산을 떠난 그의 정치 행보만큼은 높이 살 만하다. 정당을 떠나 TK 정치 발전을 위해서라도 그의 소신을 본받을 정치 지망생이 많이 나왔으면 한다.

단순 계산하면 제헌의원 이후 TK에서 당선된 의원만 1천 명이 넘는다. 그중에서 이름이 회자되는 정치인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선거에 미쳐 패가망신한 정치인이 오히려 더 기억에 남는다. 의원에 당선되면 모두 대통령을 꿈꾼다지만 현실 정치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꿈에 그리던 의원 배지를 달더라도 결국 이름 없이 사라질 가능성이 더 높다는 얘기다.

언론을 통해 총선 출마 예상자 또는 희망자 이름이 연일 보도되고 있다. 직업군도 다양하고 성장 배경도, 출마 이유도 제각각이다. 제도 정치권에 진입하면 지역과 국가 발전을 위해 한 몸 바치겠다고 저마다 약속한다.

모래시계 검사로 이름을 날렸던 홍준표 전 의원은 한 방송에서 "재선 때까지는 내 살기 위해서 정치를 했다. 3선이 된 후 국가 발전을 위해 몸을 바치겠다고 다짐했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거창한 약속에 앞서 이만섭 전 국회의장이 당부한 대로 계산하지 않고 소신을 갖고 꾀가 아닌 가슴으로 정치를 하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게 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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