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미강의 생각의 숲] 상처와 치유

입력 2019-10-30 18:00:00

권미강 작가
권미강 작가

한 사내가 서 있다. 차가운 시멘트 벽 모서리 창문으로 비치는 햇살을 받으며 사내가 웃고 있다. 듬성듬성 흰머리가 나이를 가늠케 한다. 그 아래 '나는 간첩이 아니다'라는 글씨가 적혀 있다. '간첩조작사건 고문 피해자들의 자기 회복을 위한 사진치유전' 포스터다. 사내의 이름은 '김태룡'. 전시를 준비한 임종진 작가의 SNS를 통해 처연하고도 착해 보이는 그의 웃음을 만났다.

"내가 이제야 말해 무엇해. 여기로 끌려와서 죽도록 맞고서 간첩이 돼버렸어." 이런 말들이 그의 입가에서 흘러나오는 듯하다.

'간첩'이라는 말만 들어도 몸이 옴짝해진 시절이 있었다. 얼굴이 아주 흉측한 표정일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우리가 기억하는, 아니 어림짐작한 간첩은 그랬다. 그런데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누구 하나 딱히 때리지도 못할 것 같은 사람들이 '간첩' 누명으로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당했다.

이유도 모르고 대공분실로 끌려가 아무렇게나 짓밟히고 살이 찢겨나가는 고통을 감내했다. 간첩 누명이 씌워진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정권의 희생양으로 이용당했다. 정권이 바뀌고 간첩 혐의에서 풀려났지만 세상은 그들의 억울함을 기억하지 못했다.

젊음도 가족도 친구도 사라져 버리고 흩어져 버려 그저 상처만 남은 그들에게 한 사진작가가 카메라를 내밀었다. 국가 폭력에 노출된 그들에게 셔터를 눌러 자신들의 상처를 노출시키고 세상에게 기억시키라고, 그것이 상처를 다독이고 스스로 치유하는 길이라고 알려준다.

상처를 마주해야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는 작가는 무고하게 간첩단조작사건에 희생된 사람들에게 몇 년째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는 길로 안내하고 있다. 또 다른 국가 폭력 피해자들에게도. 그들은 10월 31일 스스로 찍은 상처들을 고문이 자행됐던 남영동 대공분실, 지금은 민주인권기념관이 된 공간에서 전시한다. 이렇게 우리 현대사 또 하나의 상처가 치유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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