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선물 관계/ 리처드 M. 티트머스 지음/ 앤 오클리 외 엮음/ 김윤태 외 옮김/ 이학사 펴냄

입력 2019-10-19 06:30:00

혈액 사고팔면 이익 노린 비윤리적 수혈 범람, 자발적 기증 유지한 영국서 건강한 헌혈 이뤄져
한정된 복지 자원, 자유 경제시장 한계 넘어서는 이타주의적 국가체계 필요성 대두

선물 관계/ 리처드 M. 티트머스 지음/ 앤 오클리 외 엮음/ 김윤태 외 옮김/ 이학사 펴냄
선물 관계/ 리처드 M. 티트머스 지음/ 앤 오클리 외 엮음/ 김윤태 외 옮김/ 이학사 펴냄

혈액을 선물하는 행위, 즉 헌혈은 돈으로 사고팔 수 있는 다른 상품과 달리 낯선 이에게 주는 '선물'의 형태로 전달되고 있다. 만약 혈액 공급자에게 보수를 지급하고 혈액을 자유롭게 사고판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혈액 사고팔 때보다 자발적 기증할 때 더 건강한 사회

영국에선 한국에서처럼 자발적 헌혈자에게 의존해 피를 주고받지만, 미국에선 영리기업이 혈액 공급을 관리한다. 미국에선 수혈 1건당, 또는 특정 기준에 따라 모든 혈액 공급자에게 개인별 인센티브를 부여한다. 처리와 분배에 대해서도 많은 업무가 영리 목적으로 수행된다.

경제 논리로 비춰 봤을 땐 미국 시스템이 질적으로 뛰어나고 수요에 더 정확히 대응해 낭비도 덜 초래하는 등 효율적일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틀렸다. 현실에선 영국에서 더욱 양질의 혈액이 안정적으로 공급됐다.

영국 헌혈자의 99%는 자발적으로 피를 나눠줬으나 미국에선 자발적 헌혈자가 7~9%에 그쳤다. 영국보다 미국에서 혈액 공급 가격이 최대 15배 더 높았고, 미국의 혈액이 영국 혈액과 비교해 수혈자를 간염에 감염시킬 가능성도 약 4배가량 높았다. 영리를 취하고자 간염 보유자도, 혈액 공급 기관도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헌혈하거나 이를 도왔던 것.

실제 과거 한 미국 병원에서 심장병 환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실험에 따르면 보수를 받은 헌혈자 혈액을 수혈받은 이의 53%는 B형 간염에 감염됐으나 자발적 헌혈자의 혈액을 수혈받은 이는 아무도 감염되지 않았다.

기꺼이 베풀고자 하는 마음은 헌혈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영국인의 4분의 3은 사후 장기를 기증할 의사가 있다고 밝힌 반면 미국에선 절반 이하기 장기 기증 의사를 밝혔다. 헌혈자들 사이에선 혈액 기증이 곧 생명을 선물하는 것이라는 정서가 공유된다.

헌혈
헌혈

◆효율주의 넘어서는 이타주의적 사회체계

이론가로서 20세기 후반 영국 복지국가를 설계한 저자는 1970년 처음 출간한 당시 이 책을 통해 영국과 미국의 헌헐체계를 비교했다.

표면적으로 이 책은 영국과 미국의 헌혈 체계를 비교 연구한 것처럼 보인다. 그 이면을 보면 책은 인간사에서 이타주의가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 더욱 일반론적으로 접근하는 모습이다.

미국이 사유화한 자유 시장경제 체계로 이해 이타주의를 보건과 복지 체계에 적용하기라 쉽지 않을 것이다. 이와 달리 영국에선 이 책이 처음 나오고 수 해에 걸쳐 저자의 이로이 복지 공급을 지배하다시피 했다. '이타주의가 도덕적으로 건전하고 경제적으로도 효율적'이라는 책 속 이론이 영국의 복지국가 발전 과정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다.

1980년대 말 일부 비판가들은 '선물 관계'의 논점에 좀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면 혈우병 환자가 수혈 과정에서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에이즈)에 전염되는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책의 돌풍은 미국의 헌혈 체계를 바꿔놓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닉슨 행정부는 저자에게 자문을 구해 국가혈액정책을 도입, 자발적 헌혈 시스템을 확대했다. 혈액은행의 운영을 적극 감시하는 한편 자발적 헌혈 혈액에 이름표를 붙였다. 미국 혈액시장 내 상업적 기업이 차지하던 점유율은 1970년대 초반 30%에서 1970년대 후반 5%로 떨어졌다.

출산율이 급락하면서 건강 욕구가 강화되는 오늘날 이 책은 더욱 많은 문제점을 시사한다. 죽음과 장애의 주 요인은 전염병에서 퇴행성 질병으로 바뀌었다. 국가는 한정된 자원 내에서 환자들을 어떻게 돌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중요한 과제가 됐다. 상업성을 고려한 합리화가 공공 정신을 위협하는 가운데, 이타적 베풂과 헌신의 원칙에 눈을 돌려야 한다는 저자이 주장이 다시금 대두되는 이유다.

519쪽. 3만원.

▷리처드 티트머스는

14세에 학교를 자퇴하고 대학에 가지 못했으나 독학과 사회학적 탐구에 대한 열렬한 욕구만으로 사회학 이론을 정립한 학자다. 65세 암으로 사망할 당시까지 영국 런던정경대학 사회행정학과 교수로 재임, 복지곡가의 옹호자이자 분석가로 국제적 명성을 떨쳤다. 사회정책과 사회행정을 과학적 학문 분야로 확립하고, 복지 서비스 분야에서 저술 활동을 하며 제자들을 육성했으며, 영국과 해외 정부를 돕는 자문 역할을 하며 국내외에서 존경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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