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예술의 기억] 아버지와 음악 친구들, 그리고 그들의 시대

입력 2019-10-09 18:00:00

임언미 대구문화 편집장
임언미 대구문화 편집장

카메라를 세 대나 가지고 있었음에도 가족사진은 단 한 장만 남긴 사람, 음악으로 우리 사회를 일으켜 세우겠다고 불철주야 뛰어다녔음에도 정작 아들의 하숙비는 마련해주지 못했던 사람, 바로 바리톤 이점희(1915~1991) 선생이다. 이점희 선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진정한 예술인' '진짜 예술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은 사람' '진심으로 지역 예술을 걱정한 사람'으로 회고한다.

이점희 선생은 연중 많은 음악 인구가 배출되고, 매년 가을 오페라축제로 도시를 수놓는 대구의 오늘이 있기까지 공로가 큰 사람으로 꼽힌다. 그는 한 사람의 성악가로서 활발한 발표를 했고 음악 교육자로서 오랜 기간 후학들을 길러냈다. 이기홍(1926~2018) 선생과 함께 대구시립교향악단 창단을 이뤄냈고 대구오페라협회를 만들어 오페라 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해방 후 혼란기였던 1950년 2월, 자택에서 대구 최초의 음악학원을 열어 수강생을 모집하고 음악 교육을 시작했다. '음악'이 사회를 일으켜 세울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1970, 80년대에 이르러 대구 지역 음악대학에서 음악인들이 많이 배출되기 시작했을 때는, 그들이 안정적으로 오페라를 만들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시립오페라단 창단을 준비했다. 오페라 운동에 매진하기를 20년, 그는 안타깝게도 시립오페라단 창단(1992년)을 한 해 앞둔 1991년 세상을 떠났다.

향토 음악가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다큐멘터리 촬영차 이점희 선생의 아들 이재원 씨의 자택을 방문했다. 현관에서부터 집안 곳곳에 선생의 유품이 가득했다. 피아노, 담배 파이프, 선글라스, 수석, 도자기, 카메라, 시계, 신문 스크랩, 연주회 프로그램, 사진 앨범…. 책장과 벽에 걸린 액자도 모두 이점희 선생이 남긴 자료들이었다.

이점희 선생의 3남 1녀 중 셋째인 이재원 씨는 1948년생으로 성악을 전공했다. 유년시절의 그가 기억하는 선친의 모습은 '붉은 얼굴'이었다. 늘 예술가들과 술자리를 하고 귀가했기 때문이다. 이 씨는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의 얼굴을 '붉게' 그려 미술 과제로 냈다가, 부모의 얼굴을 모독했다고 선생님에게 회초리를 맞은 기억을 떠올렸다.

1950년부터 자택에서 대구음악학원을 운영하기 시작했을 때 가족들은 집 안에서도 혹여나 작은 소리라도 낼까 뒤꿈치를 들고 걸어 다녀야 했다. 집에 찾아오는 손님 시중은 오롯이 어머니의 몫이었다. 이점희 선생은 학교에 재직할 때도 월급봉투를 받으면 음악 친구들과 쓴 외상값을 먼저 갚은 후 남은 돈을 생활비로 건넸고 가족들은 그 돈으로 살림을 꾸려야 했다.

이재원 씨는 아버지가 그토록 몰입하는 '음악'의 실체가 무엇인지 항상 궁금했다고 했다. 선친의 권유로 음악대학에 진학했지만 이 씨는 음악가가 되면 아버지처럼 가족들을 고생시킬 것 같아 교직을 선택했다. 그가 생각한 음악은 가족들의 행복이나 여유로운 삶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재원 씨는 선친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후, 유품을 정리하면서 아버지가 그렇게 원하던 음악으로 풍요로운 사회가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고 했다. 아버지의 혼이 담긴 그것들을 보관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29년의 세월이 흘렀다. 생전에 손 한번 제대로 잡아보지 못한 아버지였지만, 집 안 곳곳에 남아 있는 흔적들을 보며 어느새 아버지가 가졌던 대구 음악에 대한 애정이 고스란히 자신에게도 이어진 것 같다. 국제오페라축제가 펼쳐지고, 연일 다양한 음악 공연이 펼쳐지는 요즘의 대구를 보면 이것이 선친이 꿈꾸던 음악도시의 모습인가 싶기도 하다.

그는 화려한 현재에 묻혀서 자신도 모르게 선친의 이름 석 자가 잊힐 것 같아 덜컥 겁이 날 때가 많다고 했다. 그는 풍요롭지는 못해도 그저 음악과 낭만이 있어서 행복해했던 아버지와 그의 음악 친구들, 그리고 그 시대가 이 도시 어디엔가 기록되기를, 그래서 그들의 꿈과 음악이 잊히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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