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래어도, 외국어도, 외계어도 모두 담을 줄 아는 한글의 억울함을 풀기 위하여
매년 10월 9일 한글날만 되면 '한글 파괴'를 비판하는 기사가 쏟아진다. 한 예로 지난해 한글날, 즉 2018년 10월 9일 연합뉴스는 ''세종대왕님이 우신다'…한글 파괴 앞장서는 지자체들'이라는 기사를 내놨다.
이 기사에서는 '한글 대체가 가능한 행정용어를 외래어로 쓰거나, 한글과 외국어를 혼용해 신조어를 만드는 지자체의 한글 파괴가 도를 넘었다는 지적이 나온다'고 전했다. 이어 '전 세계가 인정하는 가장 과학적인 문자를 갖고도 굳이 의미가 불분명한 외래어를 행정용어로 고집하는 지자체의 관행에 개선이 요구된다'고 주장했다.
※해당 연합뉴스 기사에서는 글자(한글)와 언어(국어, 우리말)의 개념을 혼동해 썼습니다. 가령 '한글과 외국어를 혼용해'라는 표현은 '국어(한국어)와 외국어를 혼용해' 또는 '한글과 알파벳·한자 따위의 외국 문자를 혼용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독자들께 뒤늦게나마 연합뉴스 대신 양해를 구합니다.
▶기사에서 제기한 일부 지적에는 고개를 끄덕일만하다.
한 예로 공문서에 쓰이는 '가내시'(假內示)는 '임시통보'라는 뜻이다. 풀어 쓰면 '공식적으로 알리기 전에 몰래 알림'이다.
'가내시' '임시통보' '공식적으로 알리기 전에 몰래 알림'.
3개 표현 가운데 쓰기 편리한 것은 무엇일까? 다시 설명할 필요가 거의 없고 짧기도 한 것 말이다. 임시통보가 아닐까? '임시'와 '통보'는 꽤 잘 알려져 있는 쉬운 단어이다. 상대적으로 낯선 '가내시'에 승리. 그리고 짧은 걸로 따지면 4자라서 '공식적으로~알림'(14자)에 승리.
따라서 공무원들은 물론 시민들도 열람하는 공문서에는 가내시 대신 임시통보라는 표기를 쓰는 게 합리적으로 옳다. 아울러 공문서에 혹시나 많은 수의 '활자'가 들어가 복잡해질 것을 감안하면 긴 '공식적으로~알림'보다는 짧은 임시통보라는 표기를 쓰는 게 역시 합리적으로 옳다. 기사에서 지적한 것처럼 가내시는 퇴출될만하다.
▶문제는 이런 경우 말고, 외래어나 혼용 신조어의 표기라는 이유로 무조건 쓰지 말자는 어조의 기사 속 주장이다.
기사에서는 '블루시티(Blue-city) 거제' '로맨틱(Romantic) 춘천' '원더풀(wonderful) 삼척' '레인보우(Rainbow) 영동' '드림허브(Dream hub) 군산' 같은 지자체 슬로건들을 문제 삼았는데, 문제될 게 없다. 가령 우리말만큼 친숙한 외래어나 외국어라면 붙여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주민들을 대상으로도 쓸 수 있고 글로벌 시대에 외국인들을 대상으로도 쓸 수 있으니 지자체 입장에서는 다용도로 쓸 수 있는 외래어·외국어가 요긴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저 슬로건들이 문제될 게 없는 것은, 외래어·외국어를 한글로 표기했다는 점이다. 우리말이든 외래어든 외국어든 뭐든 능히 담아내며 한글이 제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이게 한글 파괴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한글 파괴 문제를 다루는 기사에서 어김없이 제시하는 해결책 중 하나가 '한글 순화'이다.
연합뉴스 기사에서는 공문서 작성 시 한자어 행정용어를 한글 행정용어로 고쳐 쓰도록 개선안을 만들고 그걸 직원들에게 교육한 지자체 사례를 전했다. 한 예로 '양도양수'를 '주고받음'이라고 고쳤다고 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이 있다. 양도양수와 주고받음 둘 다 한글 표기라는 것이다. 양도양수는 讓渡讓受를 한글로 적은 것이다. 다수가 잘 모르는 한자를 다수가 잘 아는 한글로 바꿔 적어 공문서에서 쓴다. 한글이 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걸 다시 주고받음으로 고친다면? 일부에서는 뜻이 쉽게 통해 좋을 것이다. 그런데 양도양수는 업계에서도 이미 그렇게 쓰고 있고 법원 같은 공공기관에서도 이미 그렇게 쓰고 있다. 사회 곳곳에서 공유되며 원활한 업무를 가능케 해주는 단어로 양도양수가 다수에게 선택된 상황인데, 지자체만 쌩뚱맞게 주고받음이라고 쓰기 시작할 경우 오히려 지자체~업계~법원 같은 공공기관 등 간의 소통에 걸림돌이 돼 자칫 업무의 효율을 떨어뜨릴 수 있다. 호환이 잘 되던 걸 가로막으니 개선이 아니라 개악이 될 소지가 있다는 얘기다. 양도양수의 뜻이 주고받음이라는 이해는 이미 폭넓게 공유돼 있다. 그걸 기반으로 양도양수가 널리 쓰이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사례로 'Well-being'(웰빙)이 있다. 유럽에서 1980년대 중반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해 2000년대에 본연의 모습을 갖춘 개념이다. 우리나라에는 없다시피 한 개념인 이 웰빙이 들어오자 국립국어원은 굳이 '참살이'라고 순화해 표기하자고 했다. 웰빙이라는 한글 표기가 미디어와 관련 업계에 자주 노출돼 대중은 퍽 익숙해져 있는데, 낯선 신조어를 제시해 오히려 헛갈리게 만들었다. 외국어였던 웰빙은 이제 외래어 웰빙으로 정착했다. 참살인지 참소준지 하루살인지보다 사람들에게 익숙하다는 얘기다. 다만 '참으로 사는 것' 식의 참살이와 닮은 설명이 필요하다면 해 줄 수는 있겠다. 참고로 여러 사전에서 가리키는 웰빙의 뜻은 '육체적·정신적 건강의 조화를 통해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는 삶의 유형이나 문화'.
▶즉, 한글은 이런 게 아닐까. 한자 讓渡讓受를 양도양수라고 한글로 표기할 수 있으면 되는 거다. 영문 Well-being을 웰빙이라고 한글로 적을 수 있으면 되는 거다. 그렇게 한글은 자기 임무를 수행한다.
그럼에도 괜히 언론이 나서서, 국립국어원이 개입해서 긁어 부스럼 식 혼란을 종종 만든다. 외국어를 한글이 오롯이 담아냈는데, 외래어란 한글이 외국어를 오롯이 담아내 널리 쓰이고 있는 증거인데, 이들을 갑자기 '듣도 보도 못한' 낯선 단어로 바꾸자고 말이다. 또한 한글 곁에는 알파벳 같은 외국 문자가 아예 붙으면 안 된다고 말이다.
물론 각종 인권을 짓밟는 표기의 개선, 일제어 표기 잔재 문제 해결, 가내시 같은 불합리한 행정용어 표기의 합리적 교체 등의 일은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외래어·외국어 표기를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게 아니라면, 대부분 글자 표기는 쓰던 대로 쓰는 게 소통에 가장 좋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도 짚고 넘어갈 만하다. 한글 파괴 문제를 얘기할 때 주 근거가 돼서다.
일단 표준국어대사전은 한글 및 국어의 뜻을 명확히 설명해주고, 풍부한 해설도 곁들이며, 특히 초심자 내지는 잘못 알고 쓰는 사람들에게 누구보다도 정확한 교육을 제공할 수 있는, 꾸준한 연구의 성과물이어서 만드는 데 들어간 세금이 아깝지 않다.
그러나 이게 헌법처럼 군림해서야 될 일인가. 표준국어대사전이 무슨 법전인가 말이다. 국립국어원이 마치 헌법재판소처럼 이건 맞고 저건 틀렸다 그러면서 한글을 자유롭게 조합하고 표현하는 국민들에게 가하는 '꼰대짓'에는 세금이 아깝다.
또한 시대가 변화하며 새롭게 생겨나는 의미들을 한글이 신속하게 잘 담아내는 대표적 사례가 바로 신조어인데, 그게 당장 표준국어대사전에 실려 있지 않다는 이유로 지적하는 등 표준국어대사전을 진리 삼아 보도하는 언론 기사에는 휴대전화 데이터 요금이 아깝다.
▶세종대왕은 후대에게 'ㄱㄴㄷㄹㅁㅂㅅ' 자유롭게 쓰라고, 필요하면 파괴의 미학도 즐기라고, 고개가 끄덕여지는 파괴는 글자의 시장에 받아들여지고 좀 별로인 파괴는 글자의 시장에서 퇴출되는 과정을 거치는데 그게 우리 삶 내지는 문명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아마도 한글을 만들었을 것인데, 정작 그걸 제한하고 재단하는 국립국어원과 언론 때문에 우시지 않을까.
그래서 한글 파괴에 대해 이젠 좀 달리 볼 필요가 있다. 가령 젊은 세대의 외계어, 야민정음 따위는 그들의 문화를 표현하고자 탄생해 한글에 담겨 공유된다. 이런 표기는 기성 세대가 단순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말살돼야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세대 간 소통을 통해 이해될 필요가 있다.
물론 이해하기 싫다면 하지 않아도 된다. 사실 젊은 세대의 한글 파괴 표기는 또래끼리 '암호 교환'을 닮은 소통을 하려는, 즉 기성 세대가 읽지 못하도록 하는 게 한 목적일 수 있다. 그러니까 애초에 어른들은 이해하지 말라고 쓰는 것이고, 그 역시 한글을 가지고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젊은이들의 행위이다. 단, 이걸 모든 사람이 쉽게 읽어야 하는 공문서에 쓴다면, 기성 세대 위주인 심사위원들이 읽는 취업 이력서에 쓴다면, 쓴 사람은 질책을 받거나 손해를 볼 것이다. 그러니 젊은 세대는 그런 표기를 주로 친교와 유희에만 쓴다. 이렇게 가려서 한다면 한글 파괴가 뭐가 문제란 말인가.
▶외계어, 야민정음 같은 걸 주고받던 젊은 세대는 언젠가 기성 세대가 돼 다시 젊은 세대의 '이해하기 힘든' 한글 표기를 접할 것이다. 그렇게 세대와 세대와 세대의 한글은 다른 결을 나타내지만, 같은 한글을 이래저래 조합해 표현하는 것이기에 마냥 단절은 아니다. 멀리서 바라보면, 모두 한글이다.
한글은 먼저 사전에 기록된 표기를 엄준하게 지키면서도, 그게 양지와 음지 가릴 것 없는 다양한 영역의 표현들과 싸우기도 하고 물들기도 하고 포용도 하면서, 계속 변화하고 있다. 한글날은 그런 '역동성'과 '유연함'을 조명하는 날이지 파괴하는 날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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