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은 한글날이었다. 이맘때면 늘 나오는 게 한글의 과학성, 우수성 얘기다. 그런 건 식상하다. 거짓이라는 말이 아니다. 당연한 걸 자꾸 되새김질할 필요가 없다. 1970년대 나온 자동차 포니보다 신형 쏘나타가 우수하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한글은 서양의 알파벳보다 한참 뒤에 만들어진 '최신' 글자다.
정작 말해야 할 문제는 따로 있다. 한글로 된 자료가 얼마나 풍부한가다. '아우토반'이 깔려 있으면 뭐 할까. 그 위를 내달릴 자동차가 없다면. 한글이 과학적이라고 백날 떠들어댄들 한글의 경쟁력이 높아지지 않는다.
한글로 적힌 자료만 봐도 고급 지식을 얻는 데 부족함이 없어야 한다. 그래야 한글의 위상이 진정 달라진다. 그러나 현실은 어둡다. 글자 자체는 우수한데 그 글자가 담아내는 내용, 즉 '콘텐츠'가 부실하다. 박상익 우석대 교수가 책 '번역청을 설립하라'에서 번역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도 그 때문이다.
중세 유럽의 수도사들은 아랍어 자료를 라틴어로 번역하는 데 힘을 쏟았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는 그런 장면들이 묘사된다. 근대 이전만 해도 이슬람 문명에 비하면 서유럽은 야만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이슬람 세계는 고대 그리스의 과학과 철학을 번역, 자기 것으로 소화해냈다. 그리고 7~12세기 화려한 문명을 꽃피웠다. 뒤를 잇는 건 중세 서유럽. 이슬람의 학문적 성과를 번역, 소화하면서 세계 문명의 중심이 됐다. 이 둘의 공통점은 '번역'을 통해 앞선 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그 덕분에 번영했다는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바로 옆 나라 일본의 사례만 봐도 된다. 19세기 말 메이지 유신 무렵 일본 정부는 번역국을 두고 서양 고전 수만 종을 번역했다. 그게 근대화의 바탕이 됐다. 그리고 일본어로만 공부해도 노벨상을 받을 수 있는 '학문적 수준'에 도달했다.
일본 학자들은 서양의 개념을 한자어로 번역하는데 힘을 쏟았다. 'society'를 '사회(社會)'로 옮기는 등 그들이 만들어 쓴 단어는 한두 개가 아니다. 우린 그런 말을 그대로 가져다 썼다. 과거 일제 치하에선 어쩔 수 없었다 치자. 문제는 그런 흐름이 아직도 여전하다는 점이다. 번역에 대한 고민이 부족한 탓이다.
요즘엔 아예 영어를 그대로 쓴다. 연구를 좀 해보려 하면 영어 원서가 앞을 막는다. 내용을 소화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한데 외국어에 대한 부담까지 떠안는다. 지식과 정보를 쉽게 접하려면 언어의 장벽을 낮춰야 한다. 도로, 철도처럼 번역도 사회간접자본이다. 그게 외국 고전과 최신 지식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집단 지성'을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서도 번역은 활성화돼야 한다. 한글로 된 자료를 쉽게 나눠 읽고, 생각하고, 토론해야 집단 지성이 만들어진다. 영어로 논문을 쓰는 분위기가 만연한 가운데선 창의성도 발현되기 어렵다.
다들 '조국 사태'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다.
언론도 예외가 아니다. 펜을 들고 칼처럼 이곳저곳 마구 휘두른다. 이게 아니다 싶으면 이내 다른 걸 또 찌른다. 잘못 찔러 생긴 상처에 대한 미안함, 반성 따윈 없는 것 같다. 술자리에서나 내뱉을 말들이 지면에 난무한다. 감정 과잉 상태에서 칼춤을 춰댄다.
이 와중에 번역과 한글 얘기가 뜬금 없이 들릴지도 모른다. 그래도 누군가 해야 할 말이고, 짚어야 할 문제다. 더구나 한글날이 엊그제 아닌가. 광화문 앞을 점령한 채 폭언을 남발하는 이들 사이에 세종대왕상이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이 며칠 사이 더 처연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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