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친소] 대구여고에는 길고양이 가족이 산다! "학교가 내 집이다 야옹~"

입력 2019-09-18 18:00:00 수정 2021-08-13 11:53:16

교내에 누워 햇살을 즐기는 고양이 가족. 임소현 기자
교내에 누워 햇살을 즐기는 고양이 가족. 임소현 기자

사각사각 거리는 연필 소리, 팔락팔락 책장 넘기는 소리. 고요를 넘어 적막함 마저 느껴지는 학교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소리가 귀를 파고든다. '야옹~ 야옹~' 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옹기종기 모여 사료를 먹는 고양이 가족이 있다. 고양이들은 건물과 건물 사이를 자유로이 거닐며 교내를 활보하기도 하고 창틀에 올라 유리창을 바라보며 한가로이 자신의 시간을 즐긴다. 대구 수성구에 위치한 대구여자고등학교에는 길고양이 가족이 산다. 사람이 오든 말든 개의치 않고 학교의 일부가 되어 그 존재감을 뽐낸다. 어디서 왔는지 정체 모를 이 고양이들은 어느샌가 대구여고 제2의 학생이 됐다.

무더운 여름이면 고양이들은 선생님들의 차 밑에서 더위를 피한다. 임소현 기자
"나랑 놀아주면 안되냥~" 치명적인 귀여움으로 등굣길을 방해하는 고양이. 임소현 기자
대구여고 건축 동아리
무더운 여름이면 고양이들은 선생님들의 차 밑에서 더위를 피한다. 임소현 기자

◆ 고등학교에 입학한 새내기 고양이 가족

등뼈가 드러날 정도로 마른 몸에 불룩 튀어나온 배. 작년 봄 삼색 털을 가진 고양이 한 마리가 교내에 보이기 시작했다. 밥과 물을 내어주고 멀찍이 물러서도 이 녀석은 좀처럼 다가올 줄을 몰랐다. 참을 수 없는 허기에 음식을 입에 대고도 눈엔 경계심만 잔뜩. 그렇게 정성 들이기를 몇 번, 고양이는 학생들의 보살핌에 두 손 두발 다 들었다. 경계태세를 풀고 가만히 와 앉아 어느새 몸을 비벼댄다. 갈색, 하얀색, 검은색, 세 가지 털이 군데군데 섞여 있는 이 고양이는 '삼색이'라는 이름과 함께 대구여고의 가족이 됐다.

"학교 붙박이던 삼색이가 얼마 동안 안 보이더라. 추운 날씨에 어떻게 된 건 아닌지 걱정했다" 언니들 속을 꽤 썩인 녀석은 얼마 지나지 않아 홀쭉해진 배로 슬그머니 나타났다. 그러고는 발을 들어 자신을 따라오라는 듯 손짓하기 시작했다. 사라졌다 싶으면 다시 나타나 언니들을 보챘다. 삼색이를 따라간 그곳에는 아기 고양이 세 마리가 있었다. 손을 뻗으면 하악질을 하고 잔뜩 웅크린 어깨가 바들댔다. 그날로 학생들은 아기 고양이들을 살뜰히 챙기기 시작했다. 그런 학생들의 마음을 알았는지 삼색이는 얼마 후 아기들을 데리고 학교로 들어왔다. '이 언니들도 우리 가족이야' 든든한 친정집을 방문하는 의기양양한 딸의 모습처럼 말이다.

황량한 도시 공간에서 길고양이의 삶은 비참하다. 평균 수명 3년, 무분별한 번식과 발정기 소음, 쓰레기봉투 뒤지기 등으로 각종 민원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아기 고양이들의 삶은 또 어떠하냐. 교통사고와 질병과 같은 위험에 더 쉽게 노출되는 그들은 오로지 태어난 죄만으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다행스럽게도 최근 길고양이를 인간과 더불어 사는 생명으로 보호하고자 하는 인식이 커지고 있다. 불과 몇 년 사이 여러 학교에서도 길고양이 돌봄 동아리가 생겨나 자리 잡아가고 있다. 교내 길고양이를 보호하고, 사람들과 공존할 수 있도록 자발적으로 '고양이 동아리'를 조직해 활동하는 것이다.

동아리원들은 조를 나눠 고양이 식사를 담당한다. 임소현 기자
대구여고 건축 동아리 '아키네이저'에서 제작해 준 고양이 집. 임소현 기자
삼색이 가족의 귀여운 일상은 SNS를 통해 실시간으로 공유된다. 임소현 기자
동아리원들은 조를 나눠 고양이 식사를 담당한다. 임소현 기자

◆ 길고양이 보살피는 자율 동아리 탄생

삼색이 가족이 학교에 살게 된 지 몇 주가 지났을 즈음 교내는 코가 막혀 가르릉 거리는 고양이들의 숨소리로 가득 찼다. 부랴부랴 상자에 담아 병원을 찾았더니 '허피스 바이러스' 라는 진단을 받았다. 사람으로 치면 감기라고 볼 수 있는 허피스는 전염성이 높아 겨울철 길고양이의 사망률을 높이고 있다. "(고양이 가족을) 챙기는 사람을 정해두지 않아 생기는 문제가 계속해서 발생했다" 고양이들이 헤집어 놓는 쓰레기는 누가 치울 것인가. 식구가 늘며 늘어난 사룟값과 툭하면 들어가는 병원비는 누가 부담할 것인가. 고양이 양육을 위한 고민은 계속됐고 학생들은 동아리를 만들어 고양이를 관리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동아리는 점차 자리를 잡아 최근 기존 3학년 부원 5명 외에 2학년 부원 2명을 새로 맞았다. 입시 준비로 바쁘지만 틈틈이 모여 고양이와의 공존에 대해 토론을 한다. 부원들은 급식 시간표를 짜 사료와 물을 정기적으로 배식하고 있다. 그 덕에 고양이들은 공휴일이나 주말, 학교를 벗어나 쓰레기통을 뒤져야 했던 수고로움을 덜었고, 학생들은 자신만을 기다리는 고양이들을 보는 즐거움을 얻었다. 물론 고양이를 키우는 데 들어가는 돈은 동아리 부원들 개인 사비로 해결한다. "학생들이 직접 고양이를 챙기기로 결정한 것이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다른 동아리와의 교류도 활발하다. 환경(건축) 동아리 '아키네이저'는 겨울철 추위를 피할 수 있는 고양이 집을 제작해 주었고, 봉사 동아리 '베네볼라'는 삼색이 가족의 생계유지비를 지원했다. 그런가 하면 학생회 임원들까지 대동. 주주 총회 급(?) 회의를 열 때도 있다. 일상적이지 않은 일이 닥쳤을 때. 가령 삼색이가 두 번째 임신을 해 아기 고양이를 일곱 마리나 낳았을 경우를 들 수 있겠다. 이미 네 식구를 부양하고 있는 학생들은 고민 끝에 일곱 마리를 입양 보내기로 결정했고, 동아리 공식 sns를 통해 공개 입양을 진행했다.

부원들은 조를 나눠 고양이 식사를 담당한다. 임소현 기자
삼색이 가족의 귀여운 일상은 SNS를 통해 실시간으로 공유된다. 임소현 기자
부원들은 조를 나눠 고양이 식사를 담당한다. 임소현 기자

◆ 고양이로 단결! 소통의 폭 넓혀가요

#책가방 위에 떡하니 올라 그루밍 #보도블록에 드러누워 등굣길 방해. 삼색이 가족의 귀여운 일상은 SNS를 통해 실시간으로 공유된다. 학교생활을 담은 사진부터 직접 그린 팬아트까지 학생들의 제보는 실로 다양하다. 고양이에게 간택 받은 대구여고를 부러워하는 외부인의 댓글도 종종 보인다. SNS는 고양이들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통로로 활용되기도 한다. 새 식구가 생길 때면 이름 공모전을 열고, 고양이나 동아리에 관한 질문은 메시지로 주고받는다. 고양이 가족이라는 끈으로 묶인 학생들은 그들의 방식으로 소통의 폭을 넓혀가고 있다.

학교의 공기도 달라졌다. 아이들을 보러 모인 학생들 덕에 한적했던 학교 뒷마당이 북적인다. 매일같이 오는 학교이지만 안면이 있는 선후배들하고만 데면데면 인사를 나눌 뿐이었다. 하지만 고양이 가족이 대구여고에 살게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밥이나 간식 따위를 챙겨 주다 보니 자주 부딪혔고, 자주 얼굴을 대하다 보니 대화가 늘었다. 또 고양이를 무서워하거나 꺼리는 친구들에게 이해도 부탁해야 하니 자연스럽게 인사성도 늘었다. "누군가는 우리가 고양이들을 살렸다고 하지만, 입시 스트레스로 삭막하던 우리를 살린 것은 고양이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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