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원의 기록여행] 10월 항쟁의 전주곡

입력 2019-09-16 18:00:00

박창원 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
박창원 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

'도'부'군 당국에선 이 대책에 대해 긴급히 타개책을 강구 중이나 없는 곡식 줄 수 없고 가진 사람 내지 않고 여전히 막막하고 막막한 사태에 놓여 있을 뿐이며 곡식 달라는 아우성은 부청에서 도청에 쇄도하여~식량 달라는 외침 소리는 홍수와 괴질에 사무친 대구의 거리에 비장하게 울리고만 있다.'(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6년 7월 2일)

"쌀을 달라, 속히 식량을 배급하라." 7월 첫날의 후텁지근한 날씨에도 1천여 명의 주민들이 쌀자루와 바구니를 든 채 대구부청을 에워싸고 목청껏 외쳤다. 이들은 경북도청을 찾아가서도 꼭 같은 외침으로 절규했다. 굶주림을 참다못한 부민들이 집단으로 부청과 도청을 찾은 것으로 그 해 들어서만 3번째였다. 그만큼 생존에 대한 절박함이 컸고 민심은 흉흉했다.

해방 직후부터 와닿은 식량난은 해를 넘기며 더욱 심각해졌다. 당국의 쥐꼬리 쌀 배급도 중단되었다. 쌀값이 폭등한 데다 모리배들의 매점매석으로 쌀 한 톨 구경하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호열자로 교통이 차단되어 쌀 공급마저 끊겼다.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참상까지 벌어졌다. 대구부윤 관사를 습격해 투석한 것은 차라리 해프닝으로 치부되었다.

식량난이 이토록 악화된 이유는 뭘까. 해방되던 1945년의 벼농사는 평년작을 웃돌았다. 경북도는 쌀 수확량을 260만 석으로 어림짐작했다. 당시는 연간 1인당 쌀 소비량을 1석으로 잡았다. 해외 귀환 동포를 포함해 도민 250만 명이 먹어도 10만 석 정도가 남을 것으로 추산했다. 하지만 그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일제 말기 늘어난 통화량으로 물가가 들썩이는 상황에서 미군정의 빗나간 식량 정책이 한몫했다.

미군정은 한국에 주둔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10월에 미곡 자유시장제를 도입했다. 식량배급제를 폐지한 것이었다. 그러자마자 쌀값이 치솟았다. 미곡의 자유시장에 이어 해방 이듬해인 1월에는 최고가격제를 시행했다. 한 말에 75원으로 가격을 묶었지만 대구지역 시장에서는 3월에 이미 400원을 넘어섰다. 최고가격제가 고삐 풀린 가격제가 되고 말았다. 미군정은 배급제를 시행하기로 방향을 바꿨다. 미곡수집령을 공포하고 강제 공출로 추곡 수집에 나섰다. 하지만 예상 목표량에 턱없이 부족한 10% 정도의 쌀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그러자 미군정은 보리 등 하곡 수집에도 강제력을 동원했다. 경찰 등을 앞세워 일제 때와 다름없는 가혹한 방법으로 공출을 하다가 농민들과 마찰을 빚었다. 이 와중에 적지 않은 지주들과 중간 매집상들은 쌀을 시장에 내어놓지 않고 일본으로 밀수출하는 등 돈벌이에 급급했다.

대구역에서는 50여 명의 주민이 곡물을 실은 화차를 습격하는 불상사도 생겼다. 그만큼 생존이 다급했다. 1946년 9월 하순에는 대구역, 대구면직 등의 파업이 시작됐다. 특히 신문사가 속한 출판노조는 당국에 쌀 배급을 요구했다. 파업이 식량 투쟁과 결합한 것이었다. 미군정은 주민들이 죽고 사는 식량문제를 쌀값이 올라 일어난 식량 소동쯤으로 여겼다. 주민의 주림을 애써 외면한 꼴이 됐다. 대구 10월 항쟁의 전주곡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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