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X들이 얼매나 독한 놈들인지 몰라. 쇠붙이란 쇠붙이는 숟가락 몽뎅이 하나까지 싹 다 뺏어 가버렸잖아. 우리는 어려서 잘 몰랐지만 어른들은 참말로 기가 막혔을 거라. 집에 솥이 몇 개 있어도 밥 하는 거 하나, 쇠죽 끓이는 거 하나씩만 남겨 놓고 다 떼어 가버렸으니까. 솥뚜껑은 아예 다 뺏어 가버리고. 솥뚜껑을 마당에 내다 놓고 뚜드려서 깨버리니까 환장하는 거지. 그래 놓고 그걸 지들이 실어 가는 것도 아니라. 솥 뺏긴 사람들이 지게에 지고 읍내로 갖다 주기까지 해야 하는 기라. 숟가락이야 나무로 다듬어서 먹었지만 솥뚜껑이 없으니 밥은 우예 하고 쇠죽은 우예 끓이노. 나무로 밥솥 뚜껑을 만들어 덮으니 밥이 끓기만 하면 뚜껑이 휘딱 벗겨져 달아나버리는 거라. 쇠죽 쑤는 솥에는 가마니를 덮어서 안 끓였나."
추석 아래 조상님들 산소 벌초를 하고 성묘도 할 겸 숙부님들을 모시고 산으로 가는 길, 두 분이 자동차 뒷자리에 앉아 주거니받거니 옛날 얘기 보따리를 풀어 놓기 시작하셨다. 당신들 유년시절 얘기를 하시다가 어느새 일제강점기 후반부 어디쯤으로 빠져버리더니, 한참 동안 그 어름을 맴돌았다.
"밥솥만 있으면 뭐해. 밥을 해 먹을 쌀이 있어야제. 공출이라는 이름으로 동네별로 이미 물량을 다 정해 놓는 거라. 그래 놓고는 가을 되면 싹 들고 가버리니까, 도대체 먹고살 수가 있나. 집 안에 숨겨 놨다가 들키면 경을 치고 쌀은 쌀대로 뺏기거든. 그래서 채소밭에다 막 묻어 놓고는 했어."
두 분 뛰놀던 산기슭 가까이를 지날 때쯤엔 할아버지 징용당해 가시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저기 저 산에 나무하러 가셨던 아버지가 멧돼지 새끼 잡아 오신 거 기억나는가. 그때가 아버지 북해도 징용 가시기 닷새 전인가 그랬는데, 저 앞산에 가시더니 멧돼지 새끼 한 마리를 지게에 올려 지고 오셨대. 그거 한 마리 삶아 드시고 징용 가셨지. 북해도에서 정말 죽을 고생을 하셨던가 봐. 해방되고 그 다음 해에 돌아오시대. 3년 만이었지. 우리는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해서 (피해자) 신고도 못했는데, 그걸로 보상(배상)을 받은 사람도 있다 하대. 그거 참말인강?"
요즘 우리나라와 일본 양국 사이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이야기이다. 잊고 지냈는데 내 할아버지도 생전 언젠가 북해도 '다녀 왔다'고 하시지 않았던가. 징용이나 공출이라는 사건들이 내 할아버지와 숙부님들, 그리고 함께 살던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였던 거다. 대법원 판결이 어떻고, 강제징용 배상이 어떻고, 개인의 청구권이 어떻고 할 때도 그저 그러려니 했는데, 그 이야기들을 내 집안 내 조상의 일화로 들으니 감회가 달랐다.
내 할아버지는 벌써 세상을 뜨셨지만,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숙부님 같은 분들의 시간도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고 나면, 일제의 그런 만행에 대해 증언해줄 수 있는 사람들도 사라지겠지. 강제징용이나 위안부 문제 등 우리 민족이 겪어야만 했던 고통도 어느새 잊히고 말겠지.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오늘날까지 왜 그렇게 싸워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무관심하게 되겠지.
이번 추석 나이 드신 어른들이 계신 집안이라면 그분들께 졸라 이런 얘기도 한 번 들어봤으면 좋겠다. 그리고 우리 자식들에게도 전해 주고…. 잊지 않으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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