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현장] 日 수출규제 마주한 대구 기계업종

입력 2019-08-21 06:30:00

박상구 경제부 기자
박상구 경제부 기자

지난달 일본이 불화수소(에칭가스),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포토 레지스트 등 반도체·디스플레이 3개 핵심 소재의 한국 수출규제를 결정했을 때만 해도 비교적 잠잠하던 대구 제조업계가 뒤늦게 들끓고 있다. 오는 28일 일본이 한국을 백색국가에서 제외하는 수출무역관리령 개정안이 시행되면 기계업종을 필두로 한 대구 주력 산업에 미치는 영향이 적잖을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일본 수출규제 취재차 대구 달성군에 있는 금속절삭가공기계 업체 대표를 만났다. 이 업체는 핵심 부품인 콘트롤러를 전량 일본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콘트롤러는 완성된 기계 가격의 20%를 넘을 만큼 중요한 부품이다.

위로의 인사로 건넨 "힘내십시오"라는 말에 그는 의외의 답변을 내놨다. 차라리 잘됐다며 오히려 이런 일이 10년쯤 빨리 터졌으면 나았을 것이라는 말이 돌아왔다.

그러면서 그는 일본이 독점하던 기계 부품의 국산화에 성공하고도 시장에서 외면당한 일을 털어놨다. 현재 핵심 부품을 일본에서 수입하고 있는 것도 기술력 문제보다는 대기업 납품이 용이해서라는 얘기도 덧붙였다.

그는 "오래전 일본이 독점하던 기계 부품을 6년 동안 수십억원을 들여 개발한 뒤 평소 거래처였던 모 대기업에 가져갔지만 조금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며 "당장 일본 부품이 익숙한 데다 부품을 바꾸면 납품처에도 일일이 부품 변경 사실을 알려야 하는 등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고 회고했다.

이어 "품질 문제라면 납득할 수 있겠지만 단순히 '귀찮아서'라는 뉘앙스에 허탈했다"며 "차라리 이번 일본 수출규제가 기술력을 갖고 있는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동안 대구 기계업종에 일본은 성장을 가로막는 '벽'이었다. 한국기계연구원이 19일 발표한 '한‧중‧일 공작기계 및 기계요소 수출경쟁력 분석 및 제언'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일본 공작기계 수입액은 6억1천770만달러인 반면 일본으로의 수출액은 1억8천110만달러에 불과했다.

국내 대기업들은 기술력을 이유로 레이저, 초음파 등 핵심 부품을 전적으로 일본 수입에 의존했고, 대구 중소 협력사에 돌아온 것은 마진율이 낮은 단순 부품 정도였다. 야심 차게 국산화에 성공한 기업이 외면당하는 사례가 늘면서 굳이 비용을 들여 위험을 감수하려는 대구 기업도 줄고 있다는 것이 현장 얘기다. 국산과 일본 제품에서 똑같은 불량이 나더라도 국산 제품이 기술력 부문에서 유독 가혹한 평가를 받는다며 '역차별'을 호소하는 기업인도 있었다.

그래서 대구 기계업종에서 이번 일본 수출규제 사태를 바라보는 시선은 미묘하다. 물론 수입 길이 좁아져 위기감을 호소하는 기업도 있지만 그동안 일본 기업에 밀려 힘을 쓰지 못했던 대구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기회가 될 것으로 보는 시각도 적지 않다.

정부는 소재·부품·장비 국산화 지원을 위한 특별회계를 신설해 최소 5년 이상 연 2조원이 넘는 예산을 배정하기로 했다. 대구시도 국산화 기업 전수조사에 나서는 등 지원책을 검토하고 있다.

금전적 지원만큼 절실한 것이 이들 기업의 판로 확보다. 일본의 벽에 막혀 선뜻 개발에 나서지 못하는 곳에 예산 지원을 하는 한편 개발을 끝낸 기업에는 제품을 팔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대기업 입장에서 '듣지도, 보지도 못했을' 중소기업 제품을 검토라도 해볼 수 있도록 다리를 놔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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