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 1천200만 명 넘게 봤다는 영화 '알라딘'의 주인공 중 하나는 마법 양탄자다. 누구나 아는 줄거리는 역대 뮤지컬 영화 최고 흥행작 등극에 전혀 걸림돌이 아니었다. 진짜로 하늘을 나는 듯한 현란한 컴퓨터 그래픽에다 신나는 노래, 흥겨운 춤이 호평을 이끌어냈다.
그런데 원작에는 마법 양탄자가 나오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아라비안 나이트 속 '알라딘과 요술램프' 편이 아니라 '아메드 왕자와 페리 바누 요정 이야기' 편에 등장한다. 아름다운 공주와 결혼하기 위해 세 왕자가 각자 준비한 보물 가운데 하나로, 작 중 비중도 크지 않다.
물론 보물들에는 엄청난 능력이 있다. 마법 양탄자는 원하는 대로 이동시켜 주고, 상아 대롱은 보고 싶은 걸 뭐든 보여 주고, 인조 사과는 냄새만으로도 모든 질병을 치유한다. 뒷이야기는 한참 더 이어지지만 왕자들은 보물들의 위력을 합쳐 이름 모를 병에 걸려 죽어가던 공주를 살려낸다.
설화에나 나오는 영물(靈物)들이 우리에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게 아니라면, 온 국민이 읊조리게 된 포토레지스트·에칭가스·플루오린 폴리이미드 기술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미중 갈등과 북핵에다 일본 경제 보복까지, 캄캄한 앞날 생각에 식은땀이 흐른다.
이들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소재 기술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궁금해 전문가들에게 물어봤다. 그 가운데 변리사인 지인의 답변이 인상 깊었다. "만들 수 있는 것과 만들어서 돈을 벌 수 있느냐는 완전히 다른 문제인데 정부는 반일(反日)이란 단어에만 매몰돼 있다."
그는 집집마다 하나쯤은 있을 자전거 변속기 시장을 장악한 일본업체 '시마노'를 예로 들었다. 가성비 때문에 전 세계가 쓰는 마당에 한국 기업이 새로 뛰어들었다가는 망하기 십상이란 설명이었다. 기업들이 일본의 경제 보복 대응책으로 국내 소재·부품·장비산업 경쟁력 강화보다 정부의 외교적 해결을 우선순위에 두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사실 닌자의 암수(暗數) 같은 일본의 작태는 '투키디데스의 함정'으로 볼 수 있다. 미국 정치학자 그레이엄 앨리슨이 '불가피한 전쟁'에서 저술한 대로 주도권 다툼을 벌이는 국가 사이의 갈등 측면이 강하다. 그는 고대 그리스 역사가 투키디데스가 기술한 펠로폰네소스전쟁이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빚어낸 구조적 긴장 관계의 결과였다며 이렇게 불렀다.
아테네, 스파르타같이 몰락하지 않으려면 아라비안 나이트의 세 왕자처럼 자신의 보물을 기꺼이 내놓는 전략적 대응이 필요하다. 감정적으로 맞서기만 한다면 매듭은 더욱 꼬이기만 할 뿐이다. 1980년대 반도체 강국이던 일본이 이제 반도체를 수입하는 게 비교우위에 따른 글로벌 분업체제의 냉정한 현실이다.
경쟁력 강화를 위해 R&D 예산을 늘린다느니, 기업 지원을 확대한다느니,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겠다"는 레토릭으로 호들갑 떨 일이 아니다. 가마우지를 펠리컨으로 바꾸겠다는 허세를 부릴 때는 더더욱 아니다. 일본에 대한 수출규제는 정작 일본에 타격을 주기 어렵고, 되레 우리 수출 기업의 피해로 돌아올 것이라는 산업 현장의 목소리를 귀담아 들어야 한다.
또 한 번의 광복절을 맞았지만 안타깝게도 일본과의 문제는 앞으로도 쉽게 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숙명'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국민을 볼모로 하는 구태 정치에 지나지 않는다. 밤마다 처녀를 죽이는 폭군에 맞서 자신의 목숨을 걸고 스스로 궁을 찾아가 결국 백성을 도탄에서 구해내는, 아라비안 나이트의 지혜로운 세헤라자데는 지금 어디 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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