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둔자·봉오동·청산리…1920년대 대한독립군 3대 전투

입력 2019-08-13 10:02:36 수정 2019-08-14 09:20:12

오는 15일 광복 74주년을 앞두고 네티즌들은 독립군 3대 전투인 삼둔자 전투, 봉오동 전투, 청산리 대첩의 각각 전투들이 갖는 의의와 최근 지적되고 있는 문제점들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삼둔자 전투(1920년 6월)

1920년 6월 6일 만주의 삼둔자에서 독립군이 일본군을 대파한 전투다.

국내 진공작전을 계획하기 위해 봉오동에 집결한 대한북로독군부의 독립군은 30여 명의 소대 규모 병력을 두만강 건너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으로 진입시켰다. 이 독립군 소대는 6월 4일 새벽에 종성에 주둔하던 일본군 순찰소대를 공격해서 섬멸시키고 귀환했다. 그러자 온성군에 주둔하던 일본군은 남양수비대 1개 중대와 헌병·순사 1개 중대 병력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추격해왔다.

하지만 만주로 건너온 일본군은 독립군 추격에 실패했고, 양민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자 독립군 사령부는 삼둔자 서남쪽 범진령 일대에 1개 소대 병력을 매복시킨 뒤에 일본군을 그곳으로 유인하였다. 그리고 6월 6일 오전 10시 무렵에 일본군이 그곳으로 추격해오자 공격을 가해서 궤멸시켰다.

만주의 독립군 부대들이 연합하여 결성한 대한북로독군부는 첫 번째로 벌인 국내 진공작전으로 일본군 1개 소대를 섬멸했을 뿐 아니라, 삼둔자 전투에서 추격해온 일본군을 궤멸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삼둔자 전투의 승리는 뒤이은 봉오동 전투에서의 승리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봉오동 전투(1920년 6월)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 독립군 및 국민회군 등이 중국 지린성 허룽현 봉오동에서 일본군 제 19사단과 싸워 크게 이긴 전투이다.

봉오동 전투는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한 본격적인 전투에서 거둔 최초의 승리였다. 봉오동 전투로 독립군의 사기는 크게 높아졌고 일본과 맞서 승리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겨났다. 이에 독립군은 병력과 조직을 정비하고 무기를 확충하는 데 힘쓸 수 있게된 계기가 되었다.

반면에 신주백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은 계간지 역사비평 최신호에 기고한 글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 다시 보기'에서 "봉오동전투가 끝난 뒤 대한북로독군부 지휘 체계와 부대 편제는 유지되지 않았고, 내적 한계를 그대로 드러냈다"고 강조했다.

신 소장은 "홍범도는 게릴라 투쟁 방식으로 전투를 지휘했지만, 최진동은 정식 군대처럼 진지전을 추구했다"고 분석했다. 신 소장은 그렇기에 "최진동은 전투 대열을 무너트린 홍범도의 선택을 그냥 넘길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즉 봉오동전투는 전황만 보면 독립군이 승리했다고 할 수 있지만, 장기적인 관점으로 평가하면 독립군 해체의 계기가 됐다고 지적했다. 봉오동 땅의 소유자로서 홍범도 부대가 봉오동에 주둔할 때 무기와 탄약, 보급품을 제공한 최씨 3형제가 봉오동 기지를 떠나 연길현으로 이동한 홍범도의 호의적 감정을 갖기는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청산리 전투(1920년 10월)

1920년 10월에 김좌진의 북로 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 등 독립군 연합 부대가 두만강 상류에 있는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과 싸워 크게 이긴 전투이다. 크고 작은 전투가 약 일주일에 걸쳐 벌어졌으며, 청산리 대첩은 이 전투들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만든 '독립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청산리 대첩은 매우 치열했을 뿐 아니라 일본군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 독립군은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 새벽까지 10여 차례의 전투를 벌인 끝에 적의 연대장을 포함한 1,200여 명을 사살했고, 독립군 측은 전사자 100여 명을 냈다는 것이다. 이렇듯 청산리 대첩은 독립군이 일본군과 대결한 가장 커다란 싸움이었고, 독립군이 거둔 가장 빛나는 승리였다. 많은 농민들이 가난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무기를 구할 수 있도록 돈을 내고, 식량과 옷을 마련해 주는 등 헌신적으로 도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결과였다.

그런데 한국 근대사를 전공한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계간지 '역사비평' 최신호에 기고한 '보고에서 석고화한 기억으로 - 청산리 전역 보고의 정치학' 글에서 청산리 전투의 실체는 다분히 불투명하다고 지적했다.

신 연구위원은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상황에서 수일간 전투가 전개됐다는 점에서 독립군이 청산리에서 경험한 내용은 파편적이고 제한적이었다"며 오류가 발생하거나 전달 내용이 뒤섞일 가능성이 충분했다고 주장했다.

신 연구위원은 "처음에는 (독립군이) 전투를 피하고자 수세적으로 대응했다고 서술하던 내용이 점차 공세적 대응으로 변했다"며 "청산리 전투는 전개 과정이 불분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전과는 분명해졌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청산리 전투의 실상과 의의와 달리 근본적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전과 논쟁에 매몰된다면 본질이 변질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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