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포 이야기] <18> 대구지물상사, 4대를 이어가고 있는 지물포

입력 2019-08-12 18:00:00 수정 2019-08-12 18:41:24

"입맛·손맛·눈맛…한지, 누가 어떻게 만든지 척척 구분"

대구지물상사 3대 김종대 대표가 질 좋은 한지를 펼쳐보이고 있다. 박노익 선임기자 noik@imaeil.com
대구지물상사 3대 김종대 대표가 질 좋은 한지를 펼쳐보이고 있다. 박노익 선임기자 noik@imaeil.com

그 옛날, 늦가을 볕이 좋은 날은 집안의 모든 창문을 떼어다가 물을 뿜어 창호지를 뜯어낸 뒤 닦아 말렸다. 그런 다음, 풀을 쑤어 지물포에서 사 온 한지(韓紙)를 잘라서 창살에 발랐다. 손잡이 부분은 잘 해진다며 두 겹으로 발랐다. 그 사이에 국화잎이나 나뭇잎을 넣기도 했다. 그렇게 바른 문을 다시 물을 뿜어 햇살에 잘 말린 뒤, 방에 가져다 끼우면 방안이 갑자기 환해졌다. 대구 중구 종로에서 한지를 파는 '대구지물상사'는 100년이 넘은 가게로 4대째 이어오고 있다.

대구지물상사 이전 이름인 대구지물상회 간판을 가리키며 활짝 웃고 있는 김종대 대표. 박노익 선임기자
대구지물상사 이전 이름인 대구지물상회 간판을 가리키며 활짝 웃고 있는 김종대 대표. 박노익 선임기자

◆한강 이남 최고 지물포

대구시 중구 약령시 동문에서 안쪽으로 50m쯤 네거리에 있는 한 점포. 간판에 'SINCE 1907'이 쓰여져 있다. 112년 된 '대구지물상사'다. 한강 이남에서는 가장 오래된 지물포다.

대구지물상사는 일제감점기 때 지은 2층 건물이다. 1층 진열장에는 다양한 한지를 비롯해 장판, 인테리어 소품이 전시돼 있다. 진열대 뒤쪽에는 지물사의 역사가 묻어나는 오래된 철제 금고가 있는데, 아예 벽으로 만들어 이동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3대 김종대 사장은 "옛날 주인이 쓰던 금고인데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나무 계단을 타고 2층에 오르면 창고가 있다. 일제강점기 건물의 다다미, 벽칠, 창문 등의 양식을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예전에는 사장님 집무공간과 손님을 접대하는 장소였는데 지금은 창고로 사용하고 있다"며 "건축학적 가치가 있는지 건축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보고서나 논문을 쓰기 위해 들르곤 한다"고 했다.

◆60여 년을 종이와 함께

김종대 3대 사장은 1946년 청도 이서에서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60년 이서초교 졸업하고 이듬해 집안 형편상 상급학교 진학은 못하고 친척 소개로 대구 약전골목 동아지물상회에 점원으로 들어갔다. "1960년대만 해도 보릿고개를 넘기기 힘든 먹고살기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저 역시 가정의 입 하나를 덜기 위해 취직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6년 근무하다 군에 입대했다. 군 제대 후 전에 근무했던 동아지물상회와 대각선으로 마주 보고 있는 대구지물상사에 입사했다. 6개월 정도 근무하다 26세 되는 해 1971년 달성동에서 한일지물상회란 이름의 자신의 가게를 차렸다. "준비 과정을 힘들었지만 사업은 잘 돼 빚도 갚고, 집도 샀다"고 했다.

8년 뒤 1979년, 1대 김농춘에 이어 대구지물상사를 이어 받은 2대 계승자 김관채로부터 연락이 왔다. "가업을 이을 사람도 없고, 직원들이 속을 썩여 도저히 운영하기 힘드니 맡아달라"며 대구지물상사를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김관채가 자식들이 다른 길을 걷자 성실하게 일하던 김종대 씨를 후계자로 지목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김 대표는 운명이라고 표현했다. "6개월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성심성의껏 일해 신임을 얻었다. 독립 후에도 지속적으로 관계를 유지했고 영업망이랑 거래처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김 대표는 열심히 일했다. 경북 영덕과 칠곡, 경남 의령과 거창, 함양 등 한지조합과 전통시장을 다니며 한지를 구매했다. "가을 지나 찬바람이 불 때쯤 의령, 함양에 한지를 사러 다니던 기억이 떠오른다"고 했다.

종이로 벽을 바르는 도배는 대구지물상사를 지역 최대의 지물포로 만든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 대구지물상사가 번성할 때는 약전골목도 흥했다고 했다. 김 대표는 "약령시는 전국에서 한약재가 모여드는 곳인 만큼 한약재를 담는 '첩지' 수요가 많아 엄청난 양의 한지가 필요다. 또 약을 쌀 때, 약탕기를 덮을 때 쓰는 한지도 함께 잘 팔렸다. 요즘 한약은 달여서 비닐팩에 담아 주지만 예전에는 약탕기에 부채질을 하면서 달였다. 한지는 통풍이 잘 되기 때문에 약탕기를 덮는데 그만"이라고 했다.

1990년 중반까지는 사업이 잘 됐다. 직원이 많을 땐 7명, 도배사가 30여 명이나 됐다.

그 후론 사양길이었다. 지금은 한지를 비롯해 장판, 커튼, 카페트, 인테리어 등을 함께 취급하고 있다. "신용을 쌓아 아직은 견딜만 합니다."

김 대표는 1996년 아들 수효(46) 씨에게 가게를 물려줬다.

김종대 대표가 일제강점기 건축 양식 그대로 보존돼 있는 대구지물 건물 2층 창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노익 선임기자
김종대 대표가 일제강점기 건축 양식 그대로 보존돼 있는 대구지물 건물 2층 창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노익 선임기자

◆한지 예찬론자

김종대 대표에게 한지는 특별한 존재다. 그의 한지 예찬론은 끝이 없다. "한지 원료는 닥나무다. 동아시아 몇몇 나라에서 닥나무로 종이를 만들지만 한국 한지가 가장 우수하다. 한국 특히 사계절이 뚜렷한 경북에서 나는 닥나무로 만든 한지가 품질이 좋다"고 했다.

한지를 판매하는 일로만 60여 년, 온갖 종이를 다뤄온 김 대표는 굳이 만져보지 않아도 입맛과 손맛, 눈맛으로 나쁜 종이를 가려내고 누가 어떻게 만든 종이인가를 분별해낸다.

김 대표는 한지는 현대 문명병인 전자파를 차단하고 습도를 조절하며 통풍 효과도 있기에 우리 건강에 매우 좋다고 했다. "친환경적이지요. 요즘 아토피성 피부염이라든지 시력저하 현상 등은 모두 이 한지를 멀리했기 때문에 일어난 문명병입니다."

김 대표의 한지 예찬론은 끝이 없다.

◆대구지물상사, 계속 이어 갔으면…

김 대표는 요즘도 날마다 가게에 나와 자리를 지킨다. 오전 10시쯤 출근해 오후 4시쯤 퇴근한다. 이들을 못 믿어서도, 더 가르치기 위해서도 아니다. 오랜 고객들에 대한 배려 때문이다. "담수회를 비롯해 수십 년째 우리 집을 찾는 유림과 향교 어르신들을 모시기 위해 나온다. 그분들 오시면 차도 대접하고 이야기도 나누고 해드려야 하거든요."

김 대표는 아들에게 "정직, 예절 성실"을 강조했다. 4대 김수효 대표와 며느리 박태경 씨는 "아버님은 지금도 손님이 오면 90도 각도로 인사하는 등 손님을 왕으로 모신다. 아버님이 힘들게 지켜온 가게인 만큼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운영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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