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쓰레기가 준 선물/곽종상

입력 2019-08-08 18:13:17

도시로 간 촌뜨기

곽종상 씨
곽종상 씨

나는 늦둥이 외동이다. 아버지는 이름난 학자는 아니고 한문으로 편지를 주고받는 선비였다. 소작 농사를 조금 지었으나 수확량은 남들보다 못했고, 해마다 가뭄과 홍수로 망쳐 보릿고개를 더 힘겹게 넘었다. 제법 큰 마을 구장을 하신 덕분에 겨우 입에 풀칠만 하면서 내가 중학엔 갈 수 없었다.

아버지가 환갑일 때 나는 열여섯 살로 농사와 땔나무를 맡게 되었다. 논밭 갈이는 남의 손을 빌리고, 나머지 자잘한 일을 하는 것도 버거웠고, 민둥산에서 나무하기는 더 고역이었다. 3년을 견디면서, 이대로는 앞길이 너무 막막해서 아버지 승낙을 받아 혼자 도시로 나왔다. 밑천이라곤 아버지한테서 배운 명심보감과 붓글씨뿐. 그걸로 일자리를 구하려고 여러 곳을 찾았으나 왜소한 체격을 보고 모두 손사래를 쳤다. 2년을 간판집, 거울점, 제본소 등을 전전하다가 당시 인기 신문 대구지사에 들어갔다.

새벽 네 시에 일어나 서울에서 기차 편으로 내려온 신문을 리어카에 싣고 와서 배달원들에게 분배하는 일을 했다. 배달원들은 신문 속에 광고지를 끼우고, 다시 간추리느라 사무실은 먼지투성이였다. 당시 신문지는 두꺼우면서 질이 낮아서 먼지가 많았다.그래도 일정한 수입이 보장되고, 신문을 맘껏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일 년에 단 하루(1월 2일)만 놀면서도 신명나게 일했다 . 5년을 그렇게 일하다가 피로가 심하고, 식욕이 없어 밥을 제대로 못 먹고, 기침을 심하게 했다. 병원에 갔더니 폐결핵이 심하다며 바로 입원하라고 했다.

결혼한 지 4년인데 아내는 시골에서 시부모님 모시고 살았다. 1년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첫돌 지난 아기와 셋이 살던 아내는 입원 소식을 듣고 올라왔다. 생기 없이 누워있는 나를 보자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서서 눈물만 흘렸다. 아기를 업고 며칠 병수발을 하다가 시골로 돌아갔다. 연로하신 시모님 때문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다시 눈물을 지우며 돌아서는 아내에게 나는 아무 말도 못했다. 두 누님이 바느질을 하면서 사는 셋방에 같이 살았던 터라 나의 병수발도 누님이 했다. 다행히 1년 만에 완치가 되어 다시 신문사로 돌아갔다. 그새 월급이 꼬박꼬박 인편으로 전달되어 큰 도움이 되었다. 일도 않고 월급을 받는다는 건 당시로선 엄청난 혜택이라 참 고마웠다. 그 보답을 한다는 심정으로 더욱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탁한 공기 속에서 쉬는 날도 없이 장시간 일하다가는 결핵이 재발할 수 있다는 의사의 말에 2년 뒤 사직하고 나왔다.

밤새 사라진 면서기의 꿈

퇴직금으로 열 달 사글세 점포를 얻어 간판점을 차렸으나 잘 되지 않아 빈손으로 시골로 내려갔다. 그 당시는 군사정권 때였다. 마침 같은 마을의 먼 친척 형님이 장교 출신으로 면장을 맡고 있었다. 내가 찾아가 인사를 하니 잘 왔다면서 곧 임시직원 채용이 있을 건데 해볼래? 하기에, 나는 반갑게 승낙하고 그날부터 지저분한 게시물을 깔끔히 새로 써서 붙이고, 차트도 새로 만들어 걸었다. 벌써 직원이 다 된 듯 협조를 했다. 그러나 곧 연락이 있을 거라던 채용은 두 달, 석 달이 되어도 소식이 없었다. 기다림에 지쳐 잠시 바람이라도 쏘인다며 60 리 거리인 성주 고모님 댁을 찾아갔다. 버스가 없어 걸어서 갔다가 하룻밤 자고 다음날 돌아오니 그 새 면서기가 딴 사람에게 넘어가버렸다. 군인들이 행정을 맡은 때라 작전명령처럼 '내일 오전 열 시까지 임용할 사람을 군청으로 보내라.'는 연락이 왔던 것이다. 면장이 우리 집으로 사람을 보냈으나 나는 엉뚱한 곳에 가 있으니 그 명령대로 따를 수가 없었다. 부득이 한 마을에 사는 딴 사람을 보냈다는 것이다. 어찌하여 내겐 이렇게도 운이 없는가. 여러 달을 기다리다 하룻밤 나들이한 것 때문에 그 행운이 딴 사람에게 가다니... 생각할수록 억울해서 여러 날 잠을 잘 수 없었다.

이 면서기는 내 어릴 적 매우 부러워했던 꿈의 직업이었다.마을 앞 신작로에 아침마다 높다란 자전거 뒤에 도시락을 싣고 휘파람을 불면서 지나가는 모습은 마치 하늘나라 사람처럼 보였다. 그 면서기가 눈앞에 와 있다가 꿈처럼 사라졌다. 명심보감에 운이 돌아오면 가고자하는 쪽으로 바람이 불어 배가 빨리 가서 벼슬을 하고, 운수가 나쁘면 비석 탁본을 해서 몇 푼 벌려고 찾아갔는데 벼락이 그 비석을 때려 그마저 못하게 된다더니 내가 그 꼴이구나.

이제 임용 계획이 없다고 한다. 면서기는 포기하고 두어 달 고민하다가 다시 대구로 혼자 나왔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글씨를 좀 예쁘게 쓴다는 것뿐이니 등사원지에 글씨를 쓰는 프린트사로 찾아갔다. 그 전 신문사에 있을 때도 가끔 쓴 경험은 있었다. 프린트 사장은 내가 쓴 걸 보고 '좀 연습을 하면 되겠다.'고 했다. 시키는 대로 열심히 연습하여 필경사가 되었다. 3년 뒤 제법 인정받는 필경사가 되어 이제 밥벌이는 되겠다 싶어 전 가족이 대구로 이사를 했다. 7년을 떨어져 사는 동안 아이가 셋이 되었고 어머니도 계셔서 여섯 식구가 방 두 개는 있어야 했다. 셋방살이는 아이들이 기를 펼 수 없다는 말을 많이 들었고 또 연로하신 어머님도 계셔서 생각 끝에 아주 싼 초가를 샀다. 교회 땅 대지 14평, 부엌과 두 개의 방이 있었지만 아주 작았다. 상수도, 하수구가 없어서 뒷집에 호수로 연결하여 밤에 물을 받아서 쓰고, 쓴 물은 다시 대문 밖으로 들고 나가서 버렸다. 고지대라 수돗물이 잘 나오지 않아서 500미터 떨어진 공동수도에 가서 한 시간씩 기다려 물을 받아 물지게로 지고 올 때가 많았다.

네 째 아이가 태어나 일곱 식구가 되고, 맏이가 6학년이 되자 다리를 제대로 뻗고 잘 수가 없었다. 그새 아내는 온갖 부업을 했고, 나도 열심히 일해서 조금 넓은 기와집을 계약했다. 중도금을 내려고, 처남한테 빌려 주었던 돈을 받아 자전거에 싣고 오다가 그 돈을 잃어버렸다. 매사를 야무지게 하는 처남이 노끈으로 단단히 묶어 주어서 난 맘 놓고 타고 왔는데 도중에 뒤를 돌아보니 없어졌다. 얼른 왔던 길로 되돌아가며 살폈으나 신문지에 싼 돈 뭉치는 보이지 않았다. 20만원, 집값의 4분의 1이다. 정신없이 돌아와 혼자 속으로만 안고 아무에게도 말을 못했다. 아내에게도, 처남에게도 말할 수가 없었다.

여기저기 아는 사람을 통해 십만 원씩 빌려 이사를 했다. 기와집이긴 해도 원래 초가에 기와를 올린 삼 칸에다 옆과 앞으로 덧붙여 방이 다섯 개였다. 우리가 세 개를 쓰고 두 개는 전세로 주었다. 맏이와 둘째에게 방 하나를 주었더니 맏이의 첫마디가 "와아 방 엄청 넓다. 운동장에 앉아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워낙 비좁은 방에 살다가 조금 넓은 방이 그렇게 보였던가 보다.

이사하기 전 한 가지 큰 변화가 있었다.

얼음판에서 찾은 건강

필경사 일은 월급제가 아니고 원지 한 장 쓰는데 얼마라는 단가에 따라 돈을 받는다. 일은 연말연시 한겨울에 가장 바쁜데 난 겨울이면 감기로 앓아눕는 날이 많았다.일하는 날보다 더 많았다. 원래 허약체질인데다 바쁜 일이 많아서 밤샘 일을 자주 하느라 건강이 더 나빠졌다. 밤일을 해도 저녁 먹는 것 외엔 아무 혜택이 없으면서 무리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몸이 허약하니 추위도 더 심하게 느껴 겨울이 무척 싫었다. 겨울이 없는 나라로 가서 살 수는 없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1971년 1월 2일, 공군사관생도인 생질이 "날씨가 뭐 이래, 겨울이면 겨울답게 추워야지, 미지근하게..." 하면서 들어왔다. 여러 날 매섭게 춥다가 따뜻해져서 나는 참 좋은데 어찌 저런 엉뚱한 소리를 하나? 하면서 쳐다보니 그는 어깨에 스케이트를 맨 채 "삼촌 스케이트 타러 갑시다." 한다.

여남은 살 때, 장작을 다듬어 철사를 박아 만든 스케이트를 신고 무논에서 신나게 탔던 생각이 났다. 그러나 감기로 누워 있다가 겨우 생기를 찾은 상태에서 따라나설 용기는 나지 않았다. "삼촌은 경험이 있어 금방 탈 수 있습니다. 같이 가십시다." 손을 잡고 끄는 바람에 따라나섰다. 수성못은 마치 시골 초등학교 운동회처럼 북적였다.발에 맞는 스케이트를 빌려 주어 신고, 시키는 대로 무릎을 꾸부리고 아장아장 걸음마를 했다. 처음엔 좀 되더니 5분도 안 돼서 발목이 꼬부라지며 아팠다. 나와서 쉬다가 또 걷다가 여러 번 해도 진전은 없고 발목이 너무 아파서 한 시간을 채우지 못하고 벗어 주고 나왔다.

그 다음날 또 가자고 온 생질에게 "난 안 되겠더라. 말목이 아파서..." 하니까 "처음엔 다 그래요. 오늘은 괜찮을 겁니다." 그렇게 따라 나갔으나 어제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겨우 한 시간을 씨름하다 나왔다. 사흘째는 조금씩 앞으로 나가더니 나흘째는 제법 솔솔 미끄러져 나갔다. 신이 났다. 한 시간이 금세 지나갔다. 스케이트를 벗어 주고는 돌아와 당장 중고품 스케이트를 샀다.

닷새째 날, 생질은 휴가가 끝나 돌아가고 혼자 일찍 나섰다. 오늘은 내 스케이트를 신고 씽씽 신나게 달려보리라. 기대에 부풀어 수성못에 도착하니 경찰관이 호루라기를 불면서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며칠 날씨가 따뜻해서 얼음이 녹아 위험하다는 거였다. 실망이 컸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날씨가 왜 따뜻해져서 이렇게 실망을 시킬까. 이제 다음 겨울까지 기다려야 되겠네. (당시엔 실내스케이트장이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내 스스로 놀랐다. 그토록 추위가 싫어서 겨울 없는 나라로 가서 살고 싶다고 했다가 겨우 닷새 만에 겨울을 기다리다니... 이렇게 쉽게 달라질 수가 있단 말인가.

달라진 건 그뿐이 아니었다. 밥맛이 없어서 늘 반찬 투정을 했고, 내가 청했던 반찬을 만들어 주어도 두어 술 뜨고는 못 먹겠다고 수저를 놓았는데, 밥맛이 좋아져서 한 그릇을 다 먹었다. 그리고 춥다고 움츠리기만 했다가 가슴을 펴고 나서게 됐다. 운동이 이렇게 좋은 거구나. 아침 한 시간씩 겨우 닷새 만에 이렇게 달라지다니.이렇게 운동이 좋은 걸 알았으니, 겨울만 기다리고 있을 게 아니라 다른 운동을 해야지. 배드민턴을 치기로 했다. 빠듯한 형편에 새 라켓은 못 사고 중고품을 사서 아이들과 아내와 아침마다 가까이 있는 학교 운동장으로 가서 쳤다. 온 가족이 함께 노는 재미가 여간 아니었다. 아침밥 짓고, 도시락 준비하기도 바쁜 아내지만 골골거리던 남편이 생기가 돌자 신이 나서 잠깐씩이나마 같이 어울렸다.

그렇게 봄, 여름, 가을이 가고 다시 겨울이 왔다. 예년 같으면 벌써 두세 번 감기로 누웠을 건데 그냥 지나가고 있었다. 매서운 추위가 오고 수성못이 디시 얼었다. 씽씽 얼음판을 달리니 신바람이 났다. 아내와 아이들에게도 모두 스케이트를 사서 같이 손을 잡고 즐겁게 놀았다. 일 년 사이, 스케이트도 발목이 꼬부라지지 않는 신형이 나와서 아이들은 쉽게 배웠다. 엄청 구두쇠로 살았지만 운동하는 데 쓰는 돈은 아끼지 않기로 했다.

봄과 가을엔 친구들 가족과 어울려 등산도 하고, 여름방학엔 바다나 계곡으로 가서 민박을 하며 놀다 왔다. 그때만 해도 가족 피서가 드물었던지 아이들이 방학을 끝내고 학교에서 놀러갔던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하니 '와아 참 재미있었겠네.' 하며 부러워하더라고 했다.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지 못해서 군것질하는 친구들을 부러워했을 건데 그걸로 위로가 좀 되었던 것 같다.

상차림 없이 제문만 읽다.

앞에서 돈 20만원을 잃어버리고 빚을 내어 겨우 이사를 했다는 얘기를 했다. 그 무렵 장인이 돌아가시고 소상(1주기)을 맞았다. 사위로서 당연히 제수를 푸짐하게 차려놓고, 유세차... 오호통재. 라는 제문을 읽는 게 정상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않았다. 장인의 친구와 조카, 큰사위, 손서까지 제수를 차려놓고 순 한문으로 지은 제문을 읽었지만 나는 앞 사람이 차린 제수를 그냥 둔 채 한글로 쓴 제문을 읽었다.

"병부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고기와 떡과 온갖 과일을 그득하게 차린 상을 세 번, 네 번 받으시니 흡족하십니까? 저는 그렇지 않고 오히려 마음이 편치 않으시리라 짐작됩니다. 살아계실 때를 생각하니 그렇습니다. 병부님께서는 아들이나 딸, 또는 인척 집에 가셔도 융숭한 대접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또 하룻밤 주무시라고 권해도 집에 손님이 오기로 되어 있다고 핑계를 대시며 기어이 돌아가시곤 했습니다. 그건 나 때문에 별난 반찬을 장만하느라 수고가 많고 또 돈을 쓰고 하는 것이 마음에 편치 않아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토록 자녀들이나 인척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애쓰며 살아오신 병부님이 돌아가셨다고 그 마음이 달라지지 않았을 것으로 압니다. 오늘 소상이라고 이렇게 차리고 또 차리고 하는 건 잘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병부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무 것도 차리지 않고 평소 말씀하신 교훈과 정담을 되새겨 보는 걸로 제문으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그러고 평소 저에게 말씀하신 것과 앞으로 그 훈계에 따라 살겠다는 약속을 드리면서 끝냈다. 읽기가 끝나자 연세 높은 처남이

"저건 예수쟁이들이 하는 거 아닌가?" 하며 못마땅한 듯 나를 쳐다봤다.

내가 그렇게 당돌한 짓을 하는 걸 아내는 그냥 따르면서 반대하지 않았다. 결혼한 지 오래지 않아서 그렇기도 했지만 그 당시 형편으로 빚을 내어 상을 차리는 것도 너무 버거운 일이었다.

그 2년 뒤 어느 신문에서 생활합리화 수기를 공모하기에 이 이야기를 써 보냈더니 가작에 뽑혔다. '후회 없는 구두쇠'란 제목으로 신문 한 면을 다 차지하는 장문의 글이 사진과 함께 실렸다. 그로부터 나는 별나게 사는 사람으로 낙인이 되었다. 여남은 사람이 같은 사무실에서 일할 때여서 그 신문을 보고는 한 사람이 큰소리로 말했다

"와아 이렇게 신문에 크게 나고 상금도 받게 됐으니 한 턱 단단히 내야겠네."

그러자 옆에서 신문을 다 읽은 사람이 말했다.

"여기 이 신문을 읽어보고 그런 말 하이소. 우리하고는 영 다르게 살고 있는 사람인데."

하자 더 말을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 당시 같이 일하는 필경사의 한 달 수입은 6만원 안팎이었다. 그 6만원 중에서 혼자의 용돈으로 3만원을 쓰고 나머지 3만원만 집으로 가져간다고 했다. 출퇴근하는 버스비, 나와서 커피 한 잔, 그땐 믹서커피가 없었고 다방에서 아가씨가 배달해 온 것을 마셨다. 점심도 배달로 시켜 먹고 또 커피, 그리고 담배와 저녁에 술 한 잔, 밤일이 늦을 땐 택시로 귀가하면 3만원으로도 빠듯하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모두 낭비였다. 좀 일찍 집을 나서서 걷고, 커피 안 마시고, 점심은 도시락 싸와서 먹고, 퇴근도 걸어서 가면 된다. 그 여러 사람 중에서 나 혼자만 그렇게 별나게 사니 스스로 왕따가 됐지만 외롭진 않았다. 옆 사람 눈치 볼 것 없이 자기가 할 일만 하면 되는 게 필경사 일이기에 가능했다.

그렇게 구두쇠로 살면서 빚졌던 20만원을 갚는데 2년이 걸렸고, 아이들 교육도 제대로 시킬 수 있었다. 만일 그 20만원 잃어버린 사건이 없었다면 그토록 내핍생활을 하지 못했을 것이고 아이들 넷 공부를 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신문으로 공부하고, 투고하고

초등 4학년 때 글짓기 시간에 내가 쓴 글을 선생님이 칭찬해 주신 게 떠올라 글쓰기 공부를 시작했다. 신문을 맘껏 읽을 수 있는 신문사 근무 덕분에 사설,평론 등을 모조리 읽으며 공부로 삼았다. 당시 신문은 한자가 대부분이었지만 막힘없이 읽을 수 있었다. 아버지한테서 명심보감을 배운 덕분이었다. 그러다 글을 써서 신문에 투고하기 시작했다. 남들이 쓴 걸 보니 나도 쓰면 되겠다 싶어 시작했으나 좀체 실리지 않았다. 그래도 실망하지 않고 꾸준히 써 보냈다. 1년 가까이 노력한 끝에 드디어 실렸다. 제법 긴 글이 이름과 함께 신문에 나오자 하늘에나 오른 듯 뿌듯했다. 그 뒤로도 계속 보냈다. 대구 지방지엔 쉽게 실려서 다음엔 중앙지로 도전했다. 허탕을 많이 치다가 실리게 되었다. 이 투고는 나의 즐거운 취미생활이 되었다.

여행을 가거나 등산을 가거나 또 신문을 읽다가도 글감을 찾아 꾸준히 투고를 했다. '지리산 천왕봉에 올라 보니 주변에 쓰레기가 엉망으로 쌓여있었다. 파리가 득실거리고 냄새도 났다. 이름난 국립공원을 어찌 이렇게 관리하고 있는가. 입장료는 꼬박꼬박 받으면서 어디에 다 쓰는가.'라는 글이 실리고, 얼마 뒤 국립공원 경상남도지부에서 편지가 왔다. '귀하의 글을 보고 O월 O일, 헬리콥터로 쓰레기를 다 치웠습니다.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후련한 반응도 있었다. 더러는 비판을 당한 쪽 사람이 와서 '당신이 신문에 쓴 건 사실과 다르니 사과 글을 다시 써 보내시오. 그러지 않으면 명예훼손으로 고발하겠소.' 덩치가 큰 장정 두 사람이 와서 위협하기도 했다. 나는 내성적이고 소심하여 남 앞에서 말을 잘 못했고, 싸우는 사람 옆에만 있어도 가슴이 벌렁거리며 겁이 났다. 그러나 글로서 하고 싶은 말을 하고나면 속이 후련해진다. 거짓말은 쓰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위협하는 것도 두렵지 않았다. 맘대로 하시오. 하며 돌려보냈다.

투고로 가장 보람을 느낀 건 고등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에 잘못된 걸 고친 것이다. 맏이가 고교에 입학하여 새 교과서를 받아 왔기에 잠시 펼쳐 보다가 '세시풍속의 의미'라는 제목에 마음이 끌려 읽었다. '태음력은 조석간만과 일치하고 농사력에도 편리하며 노인들의 계절감에도 맞아 지금도 농어촌에서는 이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라는 내용이 있었다. 음력이 조석간만과 일치한다는 말은 맞지만 농사력에 편리하고 노인들의 계절감에 맞다. 고 한 것은 틀린다. 이 글을 쓴 사람은 24절기를 음력으로 알고 쓴 게 분명했다. 음력에 따라 농사짓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노인들의 계절감이란 것도 24절기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양력을 쓰기 전부터 절기가 있어서 음력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또 농촌 대부분의 가정에는 ㅇㅇ년 음력절기표(절후표)를 벽에 붙여 놓고 농사에 활용했다. 절기표는 입춘이 음력으로 섣달이나 정월 초순, 하순에도 있기 때문에 꼭 필요했다. 그 날짜를 음력으로 기록한 표라는 말이지 절기 자체가 음력이란 말이 아니다. 입춘이 양력으로는 해마다 2월 4일이고, 하지는 6월 22일, 동지는 12월 22일이다. 간혹 하루 늦을 때가 있을 뿐이다. 또 하지는 낮이 가장 길고, 동지는 밤이 가장 길다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으면서 절기가 음력이라고 학교에서 잘못 가르치고 있었다. 이걸 바로잡는 건 내 힘으로 어렵겠다 싶어 국어학자 이숭녕 박사께 편지를 냈더니 답장이 왔다. "귀하의 말이 맞는 것 같다."는 말만 있고 어떤 조처를 하겠다는 말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신문에 투고를 했으나 실어주지 않았다. 원고를 들고 신문사로 찾아가 설명을 하니 그제야 수긍하고 특단으로 실어주었다. 문교부에도 편지를 냈더니 고치겠다는 회신이 왔고, 2년 뒤(1980) 고친 교과서가 나왔다. 그러나 아직도 국어사전(민중서림)에 24절기는 음력이라고 되어 있다. 최근에 다시 신문을 통해 고치라고 했다.

이렇게 신문을 통해 꾸준히 공부를 하고, 투고를 하면서, 비록 학교 공부는 못했지만 무식은 면할 수 있었다. 이 이야기로 신문논술대회에 응모하여 동상을 받았다.

가족회의와 가족신문

좀 넓은 집으로 이사 온 뒤 토요일 저녁마다 가족회의를 했다. 맏이가 중 1, 둘째가 초등 5학년, 셋째가 3학년, 막내는 입학 전이었다. 각자 하고픈 이야기를 하라고 했더니 맏이는 몇 마디 하는데 둘째는 말을 않고 있기에 아무 꺼나 얘기해 보라고 두어 번 재촉을 하자 앙 울음을 터트렸다. 무슨 말을 할지 모르는데 자꾸 하라니까 답답했던 모양이다. 그 다음부터는 할 말이 있는 사람만 하게하고 오락을 많이 했다. 쉽고 시시한 거지만 하다 보니 웃음이 터지고 재미있었다. 회의록도 만들어 기록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난 뒤 다시 보니 아이들이 자라는 과정이 보여서 좋았다. 십년 넘게 계속하다 보니 처음에 말을 못해 울었던 아이가 넷 중에서 가장 말을 잘하고 웃기는 소리도 잘했다. 아이들에게 용돈도 주지 못하고 지독한 내핍생활을 하면서도 즐거움이 있었고 또 가족신문을 만들자는 의논을 했다.

맏이가 군대에서 제대하여 복학했고, 동생들 셋이 중고생이니 가능하리라 싶었다. 맏이와 둘째는 좋다고 하고, 딸 둘은 주저하면서도 따르겠다고 했다. 매월 한 번씩 내기로 하고 그 이름을 뭐라고 할까? 이런 저런 말이 나오다가 "들국화가 어떨까? 이건 우리 부부 모임에서 남자들은 기린, 사슴, 낙타 등 짐승 이름을 따고, 여성은 꽃 이름을 정해서 불렀는데 엄마는 들국화였다. 들국화는 그리 화려하진 않지만 봄, 여름을 다 보내고 늦가을 서리가 내릴 때 피면서 향기가 좋고, 아주 청초하다, 모든 꽃들이 다 피어도 묵묵히 참고 있다가 늦게야 홀로 길가에나 밭 언덕에 다소곳이 피는 꽃, 그 정신도 본받을 만하지 않을까." 그러자 모두 좋다고 했다.

1986년 9월, 첫 호가 나왔다. 8절지를 접어서 4페이지로, '들국화' 라는 이름을 가운데 넣고, 한쪽에는 금언이나 짤막한 좋은 글 하나를, 또 한쪽에는 가훈과 우리 주소,전화를 넣었다. 각자 하고픈 이야기를 자필로 쓰고, 그림을 잘 그리는 맏이가 네 칸짜리 만화도 그렸다. 만화 제목은 '와카노'라 했다. 왜 그런 말을 하느냐 또는 왜 그런 짓을 하느냐의 경상도 방언이다. 또 한 쪽엔 '호롱불'이란 제목으로 지금은 사라졌지만 옛날 살았던 생활 모습이나 풍습, 예절 등을 내가 담당했다. 마지막 장엔 각자 그 기간에 있었던 일들을 줄여서 적었다.

맏이와 둘째는 글 쓰는 솜씨가 제법 있어서 쉽게 썼고, 세 째와 막내딸은 써 본 경험이 부족한 탓인지 제때 써 내는 데 힘겨워했다. 아내는 초등 3학년 중퇴여서 한글을 쓰긴 하지만 문법이 너무 틀려서 내가 다시 고쳐 썼다. 엄마 글씨를 그대로 올리자고 맏이가 주장했지만 이건 남들이 볼 수도 있는 거니까... 하면서 대필로 썼다. 먼 훗날 다시 보니 고쳐 쓴 것이 잘못이었구나 싶었다. 말이 어색하고 문법엔 맞지 않아도 그냥 자필로 쓴 걸 그대로 실을 걸, 그게 그 사람의 참모습인데... 싶었다.

한 달에 한 번 내기로 약속 했지만 그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래서 얼마간 격월로 내다가, 또 세 달 만에 내는 걸로 여러 해를 했다. 경력이 쌓일수록 글 솜씨도 늘어서 처음 네 페이지로 하다가 여섯 페이지, 여덟 페이지로 늘어났다. 맏이와 둘째가 결혼을 하여 새 가족이 된 며느리도 참여했고 , 둘째와 세 째도 결혼하니 더욱 지면도 늘어났다. 새 며느리는 좀 더 좋은 글을 써 보겠다고 글쓰기에 도움을 주는 책도 사서 읽고 있다는 말에 고맙다고 칭찬을 했다. 손녀가 나서 자라 서툰 글씨지만 같이 싣게 되니 더욱 뿌듯했다. 맏이 가족이 미국으로 간 뒤에도 꾸준히 계속되어 16년을 내다가 컴퓨터 이 메일이 시작되면서 거의 매일 주고받게 되자 중단하고 말았다.

신문을 만들면서 맘속에 있는 말을 털어놓기도 하고 불편한 점을 지적하여 고치기도 했다. 그중에서 가장 큰 효과를 본 것은, 큰딸이 아이 셋을 기르며 정신없는 날만 보내고 있다가 '어디 조용한 곳에 가서 며칠만 쉬었으면 좋겠다.'는 글을 올렸다. 이건 좀 심각한 문제다 싶어 도와 줄 방법을 찾다가 아이들 모두를 합숙하기로 했다. 이건 참 좋은 효과를 얻어 좀 자상하게 따로 쓰기로 한다.

아이들 넷을 어렵게 키우면서도 재미있는 일이 많았다. 그런 소소한 것들이 가족신문에 담겨져 있어 가끔 새로 들추어 보면 뿌듯하다. 또 손자 손녀들이 태어나 어느새 성인이 되었고, 최근엔 두 아기의 엄마가 된 손녀가 가족신문을 다시 만들자고 건의했다. 모두에게 의사를 물으니 찬성이라 다시 만들기로 했다. 17년 만에 들국화가 다시 꽃을 피우게 된다 생각하니 벌써 마음이 부푼다.

손자 손녀들의 합숙

앞에서 잠간 얘기했던 아이들 합숙 얘기를 써 본다.

"너무 번잡스러운 나날에 정신이 없다. 매일 전쟁을 하는 것 같다. 방과 거실이 난장판이라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다. 좀 조용히 하라고 해도 그때뿐이다. 이런 하루하루를 보내자니 마음 안정이 안 된다. 어디 조용한 곳에 혼자 가서 며칠만 쉬었으면 좋겠다."

큰딸이 가족신문에 쓴 글의 일부다.

그는 중학생일 때부터 제 속옷을 스스로 빨아 입었고, 감기나 몸살이 나도 잘 이겨내며 학교에 갔다. 자상하지 못한 할머니와 동생과 같은 방을 쓰면서 불편한 게 많았지만 말없이 잘 지내다가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엄청 추운 부엌에서 어른처럼 엄마를 도왔다. 그런 딸이 이런 글을 쓴 걸 보니 여간 힘든 게 아니구나. 싶어 걱정이 되었다.

결혼하여 딸 둘을 낳고 그만 낳겠다고 했는데 아내가 권했다.

"하나만 더 낳아라. 너는 4대째 장손이라 너희 시부모님이 아들을 무척 기다리고 계실 거다." 그러자 딸은 "시댁에서는 그런 말씀 안 하시던데..." 했다.

"그건 점잖은 분들이라 말은 않고 계시는 거지, 속으로는 엄청 기다리고 계실 거다."

아내가 여러 번 권해서 하나를 더 낳은 것이 아들이었다. 그 뒤 명절에 내려가니 시부모님이 무척 좋아하시며 고맙다는 말까지 하시더라고 했다.

그렇게 세 아이를 낳은 것은 우리의 권고 때문이고, 지금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고생하고 있는 것도 우리 때문이다. 어떻게든 도와야겠다고 궁리를 했다. 우리가 올라가서 좀 도와줄까? 하다가 그건 별 도움도 안 되고 오히려 반찬 걱정만 더 하게 한다 싶었다. 가장 번잡스런 막내만 데려와서 한 달쯤 봐 줄까? 하다가 '아예 손주들 모두를 모아서 같이 놀게 하면 어떨까?' 하니 아내와 딸이 그건 너무 벅찬 일이라며 반대했다.아이 하나, 둘 보는 것도 여간 성가신 게 아닌데 여덟을 한데 모아 돌본다는 건 너무 힘겨운 일이란다. "일단 해 보고, 너무 힘에 겨우면 되돌아가면 되지. 미리 겁부터 낼 일은 아니다."하면서 내가 고집을 부렸다. 마침 여름 방학 초기라 당장 올라갔다. 서울 도봉구에 사는 손녀 손자를 데리고 수원역으로 갈 테니 너희도 아이를 데리고 나오라고 딸들에게 전화를 했다. 큰딸은 수원에 살아서 셋을 데리고 나왔고, 작은 딸은 용인 수지에서 하나를 데리고 왔다.

"아버지 혼자 아이들 여섯을 세 시간 동안 감당하시겠습니까?"

걱정을 하면서 인계하고 돌아갔다.

완행열차 무궁화, 의자를 돌려 여섯을 마주보도록 앉혀놓으니 조잘조잘 얘기하며 잘 놀았다. 나는 옆 자리에 앉아 아무 할 일이 없었다. 조금 말소리가 커지면 다른 손님들께 방해가 된다면서 조용조용 얘기하라고 했다. 옆자리의 손님들이 웃으면서 괜찮다고 했다.

아이들이 온다는 소식에 작은 아들네 남매도 와서 여덟이 다 모였다. 맨 위가 중 2,막내는 네 살이었다. 한옥 대청마루에 모두를 앉혀놓고

"자. 여기는 아파트와 달라서 걸음을 조심할 필요도 없고, 큰소리를 질러도 괜찮다.이웃집에도 미리 얘기해 놓았으니 맘껏 떠들고 뛰면서 놀아라."

그 말이 떨어지자. '와! 신난다.' 하면서 모두 일어나 일부러 마루를 쿵쾅 쿵쾅 구르며 괴성을 지른다. 마치 야외로 놀러 나온 듯 신이 나서 뛰며 논다. 그러다가 키가 큰 아이는 맨 앞에 서고 차츰 작은 아이가 앞 사람의 어깨에 손은 얹고 열차처럼 만들어 마루로 큰방, 작은방으로 돌며 논다. 마음이 놓였다. 저렇게 신이 나서 노는데 며칠은 수월하게 지나갈 것 같았다.

더위가 심한 날은 큰 물통에 물을 채워 둘씩 셋씩 들어가 첨벙거리며 놀고, 좀 시원한 날은 놀이터에 가서 땅따먹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도 했다. 하루는 앞산 골짜기로 올라가 개울물에서 놀고, 나무 그늘에서도 놀았다. 또 모두가 둘러앉아 만두를 만들었다. 만들면서도 장난기가 발동하여 붕어빵, 국화빵, 거북이, 올챙이 모양을 만들면서 서로 자기가 만든 게 더 예쁘다며 이건 내가 먹을 거라며 따로 모았다. 집에서는 밥을 잘 먹지 않아 애를 먹이던 아이가 옆에서 "와 이거 맛있다." 하면서 먹으니 덩달아 잘 먹고. 봉지에 든 짜장면을 감자와 돼지고기를 넣어서 끓였더니 "와 할아버지 짜장면 최고예요." 하며 잘 먹었다. 간식도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주는 대로 잘 먹었다. 아이들이 많아서 어려운 게 아니라 저희들 스스로 언니, 오빠 하면서 서로 챙기며 어울리니 어른들은 할 일이 없었다. 노는 모습을 바라보는 즐거움뿐이었다.

어쩌다 한 아이가 넘어져 울거나 토라져 있으면 달래다가, "너는 혼자 집에 갈래. 데려다 줄까?" 하면 안 간다며 울음을 뚝 그쳤다.

당초 예정은 3. 4일이었는데 일주일이 금방 지나갔다. 그새 아이들이 없는 집에서 조용해진 엄마들은 처음엔 애들이 애를 먹이지나 않는지 걱정하는 전화를 하더니 잘 논다는 소리에 맘을 놓고 혼자 여행을 온 것처럼 좋다고 했고, 사나흘이 되자 애들이 보고 싶다면서 언제 오느냐고 묻는다. 자꾸 더 놀겠다는 걸 다음 겨울 방학 때 다시 모여서 놀자고 약속을 하고 8일 만에 돌아갔다. 약속한 대로 그 해 겨울방학에 다시 만났고, 그 다음 방학마다 계속되어 7년이나 이어졌다.

처음엔 아이들 등살에 너무 지친 엄마를 며칠이라도 조용히 쉬게 하려고 시작한 건데 거기서 얻은 게 엄청 많았다. 자주 만나지 못할 사촌들이 여러 날 함께 먹고, 자고 놀면서 정이 듬뿍 들었고, 그 속에서 저희들끼리 지켜야할 질서도 배웠고, 엄마 아빠와의 정도 새롭게 느끼는 것 같았다. 또 집에서는 형제끼리 싸우기도 했지만 여럿 속에서 놀면서 형제간의 정을 새삼 느끼며 보듬어 주고 달래 주는 정도 생겼다. 이 합숙에 우리 부부는 큰 힘 들이지 않고 모처럼 사람 사는 재미를 맘껏 누렸고 정도 많이 쌓았다. 이렇게 좋은 걸 딴 사람들도 해 보라고 친지들에게 권하고, 신문을 통해 알리기도 했다.

아내의 우울증을 봉사로.

이렇게 내 딴엔 제법 신이 나서 활발하게 살고 있는데 둘째가 중학교에 입학하는 날.아내가 같이 갔다가 강당에 가득 앉아 있는 학생들을 보고 가슴이 터질 것처럼 답답하여 한없이 울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 한 대 크게 얻어맞은 듯 가슴이 덜컹했다. 이건 우울증이 심한 상태구나. 그 전부터 우울증이 조금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중한 상태인 줄은 몰랐다. 이대로 그냥 있어선 안 되겠다 싶어 고민 끝에 부업으로 하고 있는 바느질을 그만두게 했다.

아내는, '당신 혼자 수입으로는 네 아이 공부시키기가 어렵다.'고 하면서 몇 해만 더 하다가 그만두겠다고 했다. 아내는 집에서 온갖 부업을 해 왔다. 밤 깎기, 땅콩 까기,마늘 까기, 홀치기, 편물 뒷손질 등을 하다가 몇 해 전부터는 큰시장(서문시장) 한복점의 저고리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다. 두 누님이 비좁은 우리 집에 같이 살면서 바느질을 할 때 아내가 거들면서 배웠던 것이다. 누님들이 따로 살림을 나간 뒤 혼자 하게 되었다. 연로하신 어머님 시중들면서 아이들 넷과 친정 질녀, 조카도 같이 데리고 있으면서 바느질을 하자니 밤늦도록 눈코 뜰 새 없이 일했다. 그런 속에서 답답함도 많았고, 내가 오랜 기간 골골거리며 앓고 있어서 늘 불안했던 게 더 큰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당시 맏이가 중학교 3학년, 둘째는 중 1, 셋째는 초등 5학년, 막내는 2학년이었다.이제 겨우 공부를 시작하는 단계였지만 나는 단호히 만류하여 바느질을 그만두게 했다. 우울증이 심해지면 더 큰 어려움이 닥칠 게 번하니 그러기 전에 어떻게든 조처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제 내가 건강하니 어쨌든 나 혼자 감당할 수 있다."고 하면서 당신 건강부터 찾아야한다고 하자 아내도 따르기로 했다. 단골 한복점에 가서 그 얘기를 하자. 우리 형편을 잘 알고 있는 아주머니는 깜짝 놀라면서, "딴 집의 일을 하려고 그러는 거지요. 우리가 싹을 더 올려 줄 터이니 일을 계속해 주이소." 통사정을 하더란다. '그건 두고 보면 알 겁니다.' 하면서 돌아왔다고 했다.

다음날부터 봉사단에 나가도록 했다. 마침 친정 쪽 언니가 뇌성마비장애인 봉사를 하는 상록봉사단 단장으로 있었다. 뇌성마비 장애인은 여느 장애보다도 가장 심한 편이다. 말을 제대로 못하고, 손발이 자기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고 제멋대로 움직인다.말 한마디 하는 데도 오만상을 찡그리며 손발을 뒤틀면서 겨우 한마디씩 한다. 그래도 알아듣기 힘들 정도의 말을 겨우 한다. 그들에게 밥을 먹여 주기도 하고, 화장실 가는 것도 도와주고, 휠체어를 밀며 나들이도 같이 했다, 당시만 해도 승강기 시설이 다 되어 있지 않아서 2층, 3층 계단을 만나면 업고 올라가야만 했다. 여름엔 바닷가로 가서 같이 놀았다. 생전 처음 본 바닷물에서 얼마나 신이 났던지 괴성을 지르며 좋아하는 걸 보자 힘은 들어도 마음이 뿌듯하더라고 했다. 또 고아원, 양로원, 교도소 등도 방문하면서 여러 가지 봉사를 했다.

또 봉사단 옆에 사진관이 있었는데 그 주인과 의논하여 무료예식장을 운영했다. 거기서 무료로 결혼식을 하고, 사진 값도 싸게 하고 하객들에게 식사 대접하는 돈만 받아서 운영비로 썼다. 그 일이 매우 번거롭긴 했지만 아내가 힘든 일 대부분을 담당했다. 아내는 그런 일하는 걸 겁내지 않았다. 봉제사 접빈객(奉祭祀接賓客)을 최우선으로 여기며 사는 집에서 자라, 시집도 종갓집으로 가고 싶어 했단다. 손님 대접하는 걸 겁내지 않고 즐겁게 생각했으니 그런 봉사도 즐겁게 할 수 있었다. 장애인을 돕고, 어려운 사람들 결혼을 돕는 보람 있는 일을 하면서 우리 집의 소소한 걱정은 덜하게 되었다. 그렇게 십여 년을 계속하면서 대구시장 상, 복지부 장관상도 받고, 우울증도 많이 좋아졌다.

꽹과리로 숫기를 찾다.

난 어릴 때 숫기가 너무 없었다. 아버지가 백여 호 되는 마을 구장(지금의 이장)을 오래 하시어 아는 분이 많은데 그런 어른을 만나도 나는 부끄러워서 인사를 못했다. 늦둥이 외아들이라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 없어서 나를 보는 사람마다

"어 구장이구나. 학교 갔다 오나?" "야아 너 어디 가노? 아부지 심부름 가나?" 하면서 말을 걸어왔지만 나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도망가곤 했다. 인사하는 게 그토록 부끄럽고 두렵기도 했다. 저만치 아는 어른이 맞은편에서 오면 옆길로 내려가 마렵지도 않은 오줌을 누는 척하고, 뭘 유심히 보고 있는 척하면서 피했다. 집으로 찾아오신 어른에게도 인사를 하지 않고 딴 짓만 했다. 그로 인해 아버지한테서 골백번도 더 들은 말, "인사란 사람 인(人)자, 일 사(事)자, 사람의 일 중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고,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러니 아는 어른을 보면 꼭 인사를 하도록 해라."그래도 고쳐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성격이 활달하고 말씀도 시원시원 잘 하셨다. 어디 어떤 모임에서도 여러 사람들을 잘 웃게 하고, 구수한 이야기도 잘 하셨다. 한 방 그득한 사람들이 밤늦도록 놀면서도 아버지 이야기에 빠져 돌아갈 생각을 안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말이 없었다. 오히려 아버지가 말이 너무 많다고 싫어했다. 나는 그런 어머니를 닮아서 그런지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이런 소심하고 숫기 없는 성격은 장가를 가고, 군대 생활을 하면서도 그대로여서 별명이 색시로 통했다. 글씨를 좀 예쁘게 쓴 덕분에 중대본부 교육계를 담당했는데. 제대를 하면서 중대본부 사람들이 내게 써 준 추억담에 색시란 말이 많이 나왔다. 특히 부관은 '그런 소심한 성격으로 사회생활을 어떻게 할 건지 걱정된다. 좀 대담해지도록 노력하라'는 충고까지 해 주었다.

제대 후 직업은 앞에서 말했듯이 필경사였다. 사람을 많이 대하는 게 아니고 맡은 원고를 보고 필경만 하면 되는 거라. 성격하고는 상관없이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초면의 사람과 대화를 하거나 여성과 대면을 하면 얼굴이 붉어지고 말까지 더듬거리니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웅변대회에 나가 보기도 하고, 대화법에 도움이 되는 책을 읽어보기도 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꽹과리 개인지도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꽹과리는 내가 어릴 때 마을 어른들이 놀다가 쉬는 사이에 흉내를 내 봤는데 잘 친다는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남아 정식으로 배워보고 싶었다. 6개월 열심히 배워서 웬만큼 칠 수 있게 됐다. 얼마 뒤 마을 자치센터 프로그램에서 풍물단원을 모집한다는 안내문을 보고 아내와 같이 신청했다.지도하는 선생이 내가 치는 걸 보고 꽹과리를 맡게 하고, 아내는 장구를 치게 했다. 스무 사람 중 남자는 나와 두 사람뿐이고 모두 여성이었다. 꽹과리는 항상 앞장서서 이끌어야 하니 없는 신명도 우쭐거리며 나서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다 보니 부끄럼이 차츰 사라지고 신명나게 놀 수 있었다.

연말이 되면 자치프로그램 경연대회가 있어 출전했다. 우리는 '굿놀이'라는 이름으로 나갔다. 나는 꽹과리로 앞에서 이끌고 아내는 무당이 되어 춤을 추면서 복을 비는 역할을 맡아 열심히 연습했다. 신명나게 노는 게 연습이라 날마다 즐거웠다. 경연대회는 널찍한 강당에서 많은 청중들이 우리를 보고 있었으나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신나게 놀아 우수상을 받았다. 그 다음 해는 아내가 심청이 역할을 맡아서 했고, 또 각설이 놀이도 하면서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나의 숫기를 살려보려고 배운 꽹과리 덕분에 부부가 같이 무대에 나가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니 신이 났고, 좋은 취미생활이 되었다. 집에서 살림만 하고 부업으로 바느질만 했던 아내가 어디서 그런 끼가 숨어 있었든지. 자랄 때는 엄한 아버지와 오라버니 밑에서 기를 펴지 못했고, 노래 부르는 것조차 용납이 안 되었다고 했는데, 나보다는 훨씬 신명나게 놀아서 참 다행이다 싶었다.

뿐만 아니라 아내는 여러 곳에서 몸을 아끼지 않고 힘든 일을 앞장서 한다. 절에 가서도, 공양주를 돕고, 배식도 거들며, 동지 팥죽은 이십 년 넘게 도맡아 끓였다. 그리고 친정 화수계에서 해마다 여행을 가면 차에서부터 모든 치다꺼리를 하면서 마이크를 잡고 사람들이 지루하지 않도록 웃기고, 숙소에 가서도 모두가 함께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고 한다. 한 번은 너무 짓궂은 장난을 하자 모두가 배꼽을 잡고 웃는데 한 사람은 너무 놀라서 잠시 기절을 하는 소동이 벌어져 청심환을 먹고 겨우 정신을 차렸다고 했다.

이 여러 가지 효과가 조그마한 꽹과리 덕분이라 생각하니, 작은 일이라도 하고픈 걸 찾아서 취미를 잘 살리는 것도 삶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걷는 여행의 즐거움

2000년 봄 대구에서 광주까지 500리 걷는 행사를 노인복지관 주관으로 한다기에 참가했다. 그 재미를 알고, 그해 가을엔 해남에서 임진각까지 1,300리 걷기에 아내와 같이 참여했다. 당시 아내는 무릎이 아파서 한의원 치료를 받고 있었다. 퇴행성관절염이라며 무리한 운동은 하지 말라고 하더란다. 겁을 내며 가지 않겠다고 하는 것을 '걷다가 안 되면 차가 따라 오니 타면 된다.'면서 같이 나섰다. 7- 8일까지는 아픈 것을 참으며 힘겹게 걷다가 차츰 나아져서 후반엔 신이 나서 우쭐우쭐 춤을 추며 걸었다. 18일 완주를 하고 임진각에서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니 나도 아내도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이 걷기 행사는 노인복지관 주관이라 공짜로 했는데, 다음 해 봄, 광주에서 대구로 오는 걸 한 번 더 하고는 끝났다. 참 아쉬웠다.

이제 남이 차려주는 밥상만 기다릴 게 아니라 내 스스로 차려서 먹어야겠다. 생각하고 친구 둘을 설득하여 나섰다. 열차로 포항에 가서 해변을 따라 남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점심은 길가에서 지어 먹고 호미곶까지 가서 민박집으로 들어가 일박하고 다음날 일찍부터 걸었다. 사흘을 걸어 울산에 도착하니 다리는 좀 아팠지만 기분은 참 좋았다. 복지관 주관으로 시키는 대로 행동하는 것보다 더 자유롭고 재미있었다. 자신이 생겼다. 다음 해 봄엔 세 친구를 더 부추겨 부부가 함께 12명이 나셨다. 지난번 셋이 걸었던 울산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걸었다. 이번엔 일정한 목표도 없이 쉬엄쉬엄 걷기로 했다. 걷다가 쉬다가 점심때가 되면 갯바위 위에서 버너와 코펠로 밥을 짓고 된장을 끓여 각자 갖고 온 밑반찬을 신문지 위에 늘어놓고 둘러앉아 먹었다.

"와아 밥맛이 우째 이래 좋노."

"그래, 나는 집에서는 밥맛이 없어서 반 그릇도 못 먹는데 여기서는 배도 더 먹는다."

모두가 같은 소리를 하며 맛있게 먹고는 적당히 누른 밥솥에 숭늉을 끓여 훌훌 마시면서 참 오래 만에 배부르게 먹었다며 좋아한다.

까만 갯바위로 파도가 쳐서 하얀 옥구슬을 수만 개씩 공중으로 날리고, 그 위로 갈매기는 끼룩끼룩 노래하며 춤을 춘다. 마치 우리를 위해 노는 것만 갔다. 그냥 바라보기만 해도 흥이 나고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다시 어슬렁어슬렁 걷다가, 쉬다가 해가 뉘엿거리면 민박집으로 찾아간다. 저녁도 점심과 마찬가지로 밥을 지어 먹고는 윷놀이를 한다. 남녀로 편을 갈라서 놀면 서로 이기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아슬아슬한 고비에서는 모두 일어나 고함을 지른다. 주인집에는 미리 양해를 구했다. 딴 손님이 없으니 맘껏 노시라고 했다. 윷놀이는 이기든 지든 아무 벌칙도 없고 상금도 없는 데도 어찌나 큰소리로 응원하고 이기면 춤을 추고 진 쪽에서도 즐거워하는 사람들 보면 같이 즐겁다. 저녁을 너무 많이 먹어 걱정했던 게 웃다보니 소화가 다 됐다며 또 한바탕 웃는다.

다음날 아침에 아주머니들이 바닷가로 산책 나갔다가 어선에서 자잘한 생선을 한 뭉치 얻어 왔다. 조금만 사려고 했는데 그냥 가져가라고 하더란다. 그걸로 매운탕을 끓이니. 그 또한 별미였다. 이렇게 맛있는 매운탕 처음 먹는다며 모두가 좋아한다. 두 번째 민박집은 노래방 기기가 있어서 신나게 노래하며 우쭐우쭐 춤도 추며 놀았다.

2박 3일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열차에서 경비를 따져보니 한 집에 31,000원.

"아니 한 집이 아니고 한 사람이 그런 거 아닌가?"

"뭐 빠진 거 없나. 단디이 계산해 봐라."

"쌀 갖고 와서 밥하고, 반찬도 갖고 온 거 먹고, 왕복 열차비와 민박 두 번에 10만원,그것뿐인데 빠질 것도 없다."

"와아. 둘이 사흘을 놀다 가는데 3만 천원 들었다니. 남들한테 얘기하면 거짓말이 카겠다."

이렇게 걸으면서 노는 여행은 남자들보다 부인들이 더 좋아했다. 집에서는 지겹도록 밥 짓고, 반찬 만드느라 신경 쓰는데, 여기 나오면 남자들이 다 하고 설거지도 다 하니 가만히 앉아서 받아먹기만 한다.

"이런 호강이 어데 있노. 우리는 한 달에 한 번씩 오면 좋겠다." 부인들은 평생 해 보지 못한 호강을 하는 듯이 좋아했다.

적은 돈으로 이렇게 재미있는 여행을 왜 딴 사람들은 하지 않을까? 싶어 여행스케치에 두 번(03년12월과 04년 6월) 소개하고 신문에도 자랑을 했다.

우리는 멀리 가지 않고 가까운 동해안을 해마다 봄가을 두 번씩 11년을 계속 다녔다.주변에 다른 친지들과도 여러 번 같이 나갔다. 2007년 제주 올레길이 생겨 많은 사람들이 걷기에 나서자 전국 곳곳에 걷는 길이 많이 만들어졌다. 내가 걸었을 때보다 더 멋진 풍광을 보면서 걸을 수 있게 됐으니 참 다행이다.

숙명적인 친구

친구와 거의 매일 E메일을 주고받는다. 최근에 그 친구가 '우리는 숙명적인 친구'라고 편지에 썼다. 무슨 숙명이라고 까지... 그러다 다시 생각해 보니 그 말이 과장이 아닌 것 같다. 열 살부터 만나서, 편지를 주고받고 하는 게 68년이다. 지금은 컴퓨터만 열면 편지가 와 있어서 읽고, 답장을 써서 보내면 되지만 옛날엔 그게 쉽지 않았다. 우표 한 장 살 돈도 없어서 며칠을 고민하다가 겨우 구해서 반시간 넘게 걸어가 우표를 사서 부쳐야했다. 같은 마을에 살아 같이 학교에 가고 오면서 온갖 짓궂은 장난도 하면서 다니다가 그 친구가 겨우 열여덟 살에 한국전쟁이 일어나 소년병으로 입대했다.나보단 한 살 위인 그는 키가 좀 컸기 때문이다. 전쟁터에서 내게 편지를 보낸 것이 그 시작이다.

그의 집에는 어머니와 형이 있었지만 답장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나는 빠짐없이 편지를 보냈다. 그렇게 꾸준히 이어지면서 본가의 안부도 내게 묻곤 했다.

그가 제대한 뒤 직업을 찾고 있을 때 나는 먼저 대구로 나와 신문사에서 일을 했다. 그 덕분에 신문을 매일 우송해 줄 수 있었다. 그 신문 광고란에서 경찰관임용 공고를 보고 응시하여 합격했고 경찰관이 되었다. 시골 여러 지서 근무를 하면서도 편지는 계속됐다. 그 편지로 인해 내가 도움을 받기도 했다. 신문사를 그만두고 간판점을 차린 것이 뜻대로 되지 않아 시골로 내려갔고, 실의에 빠져 있을 때였다. "지금은 잠시 실망스럽지만 그대는 영특하니 곧 새 길을 찾게 될 것이다." 그냥 위로하는 말이었지만 크게 용기를 얻었고, 새 출발을 할 수 있었다. 그가 정년퇴직 후엔 자주 어울려 다니면서도 편지는 더 자주 주고받았다. 컴퓨터가 나와서 더 편리하게 되자 매일 편지가 오간다. 하루만 빠지면 무슨 탈이 났는가 싶어 전화로 확인하고서야 마음을 놓는다.

해마다 6월이 되면 전쟁 때를 회상하며 전적지를 찾아갔다. 멀리 강원도 철원 인민당사와 백마고지를 바라보면서, 60년이 훨씬 지난 지금, 그때 거기서 어떤 일이 있었다고 소상하게 이야기하면 나도 마치 그 자리에 같이 있었던 것처럼 공감이 되었다. 그는 너무 심한 폭음 소리 때문인지 한쪽 귀는 듣지 못하고 한쪽 귀로만 대화를 하고 있다. 부인들도 서로 친 동서나 되듯이 잘 지낸다. 조금만 색다른 음식이 있으면 들고 가서 나누어 먹고, 밥을 잘 먹지 못하고 있다고 하면 죽을 쑤어 가서 같이 먹기도 한다.

아흔이 가까워지니 여기저기 아픈 데가 늘어나고 다리가 부실하여 멀리 나들이를 같이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지만 그는 지금까지 이렇게 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다면서 늘 밝게 살고 있다.

이렇게 숙명적인 친구가 두 사람 더 있다.

한 마을에서 자라 같이 학교에 다닌 동갑내기다. 그도 나와 같이 외아들로 자랐다.조금 다른 것은 살기가 우리보다 나아서 시골에서 중학을 마치고 대구상고 야간부를 나왔다. 고등학교는 시킬 형편이 안 되는 것을 내가 권해서 억지로 다녔다, 낮엔 일을 해서 벌고, 야간에 다니면 된다면서 권했는데 그게 뜻대로 되진 않았지만 그는 그렇게라도 공부를 한 덕분에 식품공장 경영을 맡아 할 수 있었다고. 늘 고마워한다.

부산에 살아서 자주 만나진 못했지만 자잘한 일이라도 서로 오가며 정을 나누었고,노후에는 더욱 자주 만나 여행을 같이 했다. 대구 광주 5백리를 같이 걷기도 하고, 해마다 봄과 가을에 동해안 걷기 11년을 부부가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었다. 2016년 가을 울릉도에 네 부부가 같이 가서 놀다온 일주일 만에 갑자기 가버렸다. 평소 약도 먹지 않고 건강한 편이었는데 앓아눕지 않고 갔으니 생로병사 중 병은 뛰어넘고 간 것이다.서운하긴 하지만 멋진 죽음이라 부럽다는 고별사를 읽어 주었다.

또 한 친구는 같은 필경사란 직업 덕분에 만났다. 우연히 옆에 앉아 일을 하다가 통성명을 하자면서, "고향이 어딘데?" "창녕 이방." "어? 나도 바로 옆이네." 도와 군은 다르지만 십여 리 거리였다. "나이는?" "스물여섯." "어? 동갑이네." "생일은?" "구월 초하루," "뭐? 나는 초이틀인데. 하루 차이네." "형제는?" "혼자뿐이다." "나도 독신인데."

이렇게 희한한 만남으로 같은 일을 하면서 같이 놀러 다니고, 부부는 물론 아이들도 두 집이 2남 2녀로 같은 또래여서 다정한 친구가 되어 함께 산으로, 바다로 어울려 다녔다. 겨울이면 얼음판에, 여름엔 강이나 바다로, 친 형제처럼 어울려 다녔다. 또 대구, 광주 5백리를 두 번, 해남에서 임진각까지 천삼백 리도 같이 걸었고, 동해안 걷기도 늘 같이 했다. 집도 가까워서 아침 산책도 같이 하고, 조금 색다른 음식을 만들면 나누어 먹곤 한다.

난 외동이면서 사촌도 한 분인데 연세가 높아 그 아들이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다.내 또래의 종질이 있어 참 정답게 지내다가 일찍 가버렸다. 그러니 내게 이런 친구들이 없었다면 얼마나 외로운 신세가 됐을까. 이 밖에도 가끔 만나는 친구가 여럿 있긴 해도 위의 세 사람은 정말 숙명적이라 할 만큼 좋은 친구들이다.

쓰레기가 준 선물

아침마다 산길 산책을 한다. 향긋한 소나무 향기와 아카시 꽃향기를 마시며 산새들 노래도 듣고, 다람쥐 재롱도 보고, 가끔은 산토끼와 노루, 멧돼지도 지나간다. 대도시에 살면서 이런 산이 가까이 있으니 참 다행이라 여기며 즐겁게 걷는다. 그 덕분인지 아흔이 가까우면서도 아직 건강에 별 이상이 없다.

이 좋은 산길에 한 가지 거슬리는 게 있었다. 과자 봉지, 음료수 껍질, 담배꽁초, 휴지 등이 지저분해서 상쾌한 기분을 조금 앗아간다. 저런 게 없으면 더 좋을 건데... 눈살을 찌푸리며 지나다니다가 줍기로 했다. 처음엔 쑥스럽기도 하여 사람들이 지나간 뒤에 줍고 의자에 앉아있는 주변은 그냥 지나갔다, 잘난 체 하네 라며 핀잔을 듣지나 않을까. 더욱이 담배 피는 사람들은 '너 그런다고 내가 못 버릴 줄 아나' 하며 덤빌 것도 같아 겁도 났다. 또 너무 많아서 혼자 감당할 수 있을까 염려도 되었다. 길 폭은 3미터, 거리는 천 미터 남짓 된다. 며칠 줍다보니 생각보단 힘들지 않았고, 지나가던 사람이 "좋은 일 하십니다." "수고하십니다." 하는 소리에 쑥스러움은 사라지고 용기가 생겼다. 차츰 버리는 사람도 적어져서 깨끗해지자 보람이 느껴졌다. 허리 굽혀 줍는 수고로움만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도 못한 뿌듯함이 다가왔다. 그냥 산책만 하던 때보다 기쁨 한 가지가 더 보태졌다.

그게 어느덧 사십 년이 되었다. 처음엔 비닐봉지 하나를 들고 주웠는데 이젠 맨손으로 다니며 몇 개 줍기도 하고, 하나도 줍지 못할 때도 있다. 그새 버리는 사람이 드물게 되었고, 또 가끔은 줍는 사람도 만난다. "경쟁자가 생겼네요." 하며 서로 웃었다.작은 쓰레기 한두 개라도 줍고 나면 뿌듯하고, 또 한 개도 없는 날이면 '이 깨끗한 산길은 내가 만든 거야.'자부심이 생긴다. 최근에 이 길이 '앞산자락길'과 연결되어 더욱 다니는 사람이 많아졌다. 더러는 맨발로 다니기도 하고 더러는 길이 하도 좋아서 두 번 세 번 오가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마치 우리 집 정원이 아름다워서 구경 온 사람처럼 반갑다. 또 간혹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을 봐도 밉지 않다. 그런 사람이 있어 내가 이렇게 뿌듯함을 느끼고, 멋진 정원을 가진 부자가 된 거니까. 남들이 눈살을 찌푸리는, 아니 나도 처음엔 눈살을 찌푸리며 바라봤던 쓰레기가 내게 이토록 좋은 선물을 안겨 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앞으로도 이 쓰레기 줍기는 내가 걸을 수 있는 날까지 계속할 것이다. 비록 그러지 못할 때가 온다 하더라도 이 길만 생각하면 뿌듯한 마음은 남아 있을 것이다.

앞에서 아내가 봉사단에 나가 장애인 돕는 일을 했다는 얘기를 했는데 그걸 보고 나도 봉사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 산길 쓰레기 줍기도 그로 인해 시작할 수 있었다.

내가 살아온 여러 가지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이 쓰레기 줍는 거만큼 나를 오래도록 뿌듯하게 한 건 없다. 내가 만일 이걸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토록 즐겁지도, 건강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한때 시니어클럽에 들어가 시각장애인에게 책 읽어주기,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 휠체어를 밀면서 나들이하기, 주민자치센터에서 서예 지도, 가훈 써 주기 봉사도 했지만 그런 건 그리 오래 하지 못했고, 그때의 기쁨뿐이었다. 그러나 이 쓰레기 줍기는 40년이 되었지만 한결같이 나를 뿌듯하게 해준다. 이보다 더 좋은 선물을 난 받아본 적이 없다.

30대 중반, 건강을 잃고 골골거릴 때 아내는 내 걱정을 많이 했다. "저 어린 것들 고등학교 마칠 때까지는 살아야 할 낀데....." 그러고 50년이 지난 지금은 오히려 아내가 나보다 다리 허리가 약해졌다. 그만치 몸과 마음의 골몰이 많아서 그렇게 되었다. 아침마다 산길 산책을 하면서 좀 힘이 되어주느라 손을 잡고 다닌다. 그렇게 걷다가 조그마한 꽁초를 발견하고 그걸 줍느라 잡았던 손을 놓는다. 아내는 잠시 멈추어 서서.

"당신 그거 알아요?"

"뭐?"

"당신이 이 길에서 하는 거, 내한테는 반에 반도 못하고 있다는 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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