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칼럼]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

입력 2019-08-05 06:30:00

정창룡 논설주간
정창룡 논설주간

문재인 대통령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했다. 대통령 취임 때도 '제 가슴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열정으로 뜨겁다'고 했다. 대통령의 뜨거운 열정은 실현됐다. 우리는 지금 한 번도 가지 않은 길을 가고 있다.

한일 관계가 이토록 얼어붙은 적은 없었다. 바닥 밑에 지하실이라더니 일본이 '가장 가까운 이웃나라'인 한국만 콕 집어 백색국가 리스트에서 제외했다. 북이 연일 신형 미사일을 쏘아대도 꿈쩍도 않던 대통령이 직접 나서 '우리는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을 것'이라며 비장한 각오로 일전을 독려했다.

한일 지도자들이 서로의 나라를 두고 '적반하장', '믿을 수 없는 나라'라며 노골적으로 능멸하는 상황은 여태껏 경험하지 못한 일이다. 양국 리더십이 정면으로 충돌하자 반세기 넘도록 쌓아온 한일 신뢰 관계는 한순간 적대 관계로 전락했다. 대통령은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고 하는데, 그렇게 말하는 기업인은 없고, 불안해하는 국민은 많다. 저지레는 두 나라 정상이 하고, 걱정은 국민이 한다. 일찍이 없던 일이다. 우리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에 살고 있다.

안보는 시계 제로다. 북은 연일 신형 무기를 과시한다. 물론 한국이 '과녁'이다. 북은 우리 미사일 방어체계로 잡을 수 없는 신형임을 감추지도 않는다. 액체 연료던 미사일이 고체 연료로 바뀌었다. 고체 연료라면 우리 정부가 믿고 의지하는 킬 체인은 무력화되기 십상이다.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SLBM) 능력을 과시하고, 이를 탑재할 수 있는 3천t급 잠수함을 건조해도 정부는 무덤덤하다.

반면 북은 악착같다. 사사건건 9·19 남북군사합의 위반을 거론한다. 우리가 F-35기를 들여올 때도, 한미연합 군사훈련을 할 때도 어김없이 '자멸' '불바다' 운운하며 딴죽을 걸었다. 정부가 한 일은 그때마다 스스로를 무장해제한 것이다. 우리 군은 더 이상 북을 주적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한미 합동군사훈련은 사실상 중단됐다. 한미일 동맹은 더 이상 굳건하지 않다.

동맹이 흔들리니 영해와 영공도 흔들린다. 주변 어느 나라도 우리나라를 건드리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는다. 러시아 군용기가 우리 영공을 침범해 7분 동안을 헤집고 다녔다. 중국과 러시아 군용기가 동시에 우리나라 KADIZ를 연합해 침범하는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북한과 중국, 러시아는 툭 하면 우리 안보를 시험하고 능멸한다. 미국은 한국의 안보를 대신하는데 돈을 내라며 압박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영락없는 동네북 신세다. 그런데도 이를 경계하면 반평화주의자로 낙인찍힌다. 우리는 분명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에 살고 있다.

경제성장률은 뚝뚝 떨어진다. 우리가 세계 경제 성장을 견인하는 것은 보았지만 세계 성장률을 갉아 먹는 꼴은 처음이다. 수출이 쑥쑥 늘어나는 상황엔 익숙해도 두 자리로 감소하는 꼴은 경험하지 못했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에서 계속 살고 있었는지 모른다. 2013년 미국의 석학 엠마뉴엘 페스트라이쉬가 저서 '한국인만 모르는 다른 대한민국'에서 말한 그 나라다. 그는 책에서 '저개발국가에서 선진국이 된 특이한 국가 발전 경험'을 이야기하고 자부심을 가지라고 주문했다. 그 세상에서 우리는 소득 수준 60달러에서 3만달러를 이루는 기적을 일궜다. 최빈국에서 선진국으로 발돋움했다. 원조를 받던 나라서 주는 나라가 됐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기대하기보다 차라리 과거 경험을 소중하게 여기고 가꿔 나가는 편이 나을 뻔했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