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시대에 이르러 백제 견훤과 고려 왕건은 삼한을 통일하기 위해 전략상 요충지를 선점하고자 치열한 전투를 이어나갔다. 이런 과정에서 대구와 관련된 대표적인 전투가 '공산전투'였다. 927년에 들어 고려 육군은 용주(예천군 용궁)와 근품성(문경시 산양면)을 함락하였고, 고려 수군은 강주(진주)를 공격하여 4개의 고을을 점령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려 군대는 대야성(합천)까지 차지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견훤은 전세를 만회하기 위하여 근암성(근품성)을 함락하고 고울부(영천)를 점령하였다. 이에 다급해진 신라 경애왕은 왕건에게 구원병을 요청하였고, 이를 눈치 챈 견훤은 경주를 기습 공격해서 호국 의식을 강조하려는 팔관회를 거행하고자 포석정에 행차했던 경애왕을 살해하고 헌강왕의 외손자 김부를 왕위에 추대하였다. 이때 신라를 돕고자 출동한 왕건 군대는 공산전투에서 견훤 군대와 접전 끝에 참패하여 위기에 놓였으나 신숭겸, 김락, 전이갑-의갑 형제가 고귀한 목숨을 바친 대가로, 왕건은 극적으로 공산을 탈출하였다.
현재까지 대구 지역에는 왕건이 도주하는 과정에서 유래된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 가령 '무태'는 왕건이 병사들에게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던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고, '연경'은 왕건이 선비들이 경전 읽는 소리가 낭랑하다고 감탄했던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해안'은 왕건이 어느 정도 멀리 도망가서 걱정이 사그라지자 그의 굳었던 얼굴이 풀렸다는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설 등이 대표적이다.
대구에는 공산전투에서 왕건을 대신하여 장렬한 죽음을 맞이했던 세 사람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추모하는 장소가 있다.
고려 개국 일등공신 신숭겸을 기리기 위한 신숭겸장군유적지(대구광역시 동구 신숭겸길 17)와 충렬공 전이갑-충강공 전의갑 형제를 모시기 위한 한천서원(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가창동로 117)이 있다. 이곳을 방문하여 세 분의 공신이 걸어온 발자취와 그들이 보여준 애국심과 이타심을 몸소 체험할 수 있기를 권하는 바이다.
영남중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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