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영의 근대문학을 읽다] 우리가 모리사키 가즈에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

입력 2019-07-25 11:36:10

정혜영 대구대학교 인문교양대학 초빙교수

모리사키 가즈에(1927- 현존)
모리사키 가즈에(1927- 현존)

조선이 자신의 '고향'이라고 말하는 일본인이 있다. 바로 작가 모리사키 가즈에(森崎和江)이다. 그녀는 1927년 대구에서 태어나서 1944년 일본으로 귀국하기까지 17년간을 조선에서 살았다. 유년기와 청소년기 대부분을 조선에서 보낸 셈이니 조선을 고향이라고 부를 만하다. 일제강점기를 기억하는 한국인치고 모리사키 가즈에의 이 발언을 달가워하는 사람이 과연 누가 있을까. 그렇지만 모리사키 가즈에는 조선은 자기 존재의 근원을 이루는 원향(原鄕)이라고 단언한다. 그리고 자신을 키워준 어머니라고 말한다. 모리사키 가즈에의 에세이 '경주는 어머니의 부르는 소리'(1984)는 고향으로서의 조선에 대한 기억을 담고 있다.

그 기억은 어린아이답게 담백하다. 중국인 식당과 러시아인 상점을 지나서 아버지를 만나러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로 뛰어가던, 천진난만하기 그지없는 열 살 소녀의 마음, 딱 그만큼이다. 그 마음에 제국과 식민지 간의 경계가 있을 리 없다. 글 속의 소녀는 아버지와 함께 강변을 산책하고, 어머니와 조선인 시장에 가서 물건을 사는가 하면, 어머니가 만들어 준 치킨라이스를 먹고, 크리스마스가 가까워 오면 어떤 선물을 받을 것인가를 기대한다.

또한 그 소녀는 조선인과 일본인이 서로 다른 학교에 다니고, 조선인 학생은 학교에서 일본말을 사용하며, 일본군인들이 대구 땅을 마음껏 누비고 다니는 모습을 별다른 이질감이나 의문 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태어나면서부터 봐온 풍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조선인 여자와 일본인 남자 간에 태어난 혼혈 아이를 보면서 불쾌감이나 저항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안온한 일상에 감추어진 식민지 조선인의 증오와 분노, 슬픔, 조선인이 당하는 차별에 대해 겨우 열 살을 넘어선 어린 소녀가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경주는 어머니의 부르는 소리'가 이처럼 어린 소녀의 천진난만한 기억으로 채워져 있는 것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어른이 된 모리사키 가즈에가 유년기의 기억에 가하는 차가운 비판이 함께 들어있다. 일본인들이 조선에서 누린 안온한 일상을 두고 "우리들의 생활이 그대로 침범인 것이었다"고 말한다. 식민지 조선 땅을 거쳐 간 일본인 그 어느 누구도 내뱉은 적이 없는 말이다. 또 일제가 일으킨 전쟁에서 죽어간 수많은 조선인들에 대해서 자신을 대신하여 희생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식민지 조선 땅에서 태어난 일본인 그 어느 누구도 내비친 적 없는 감정이다.

이러니 모리사키 가즈에에게 있어서 조선을 기억하는 일이 어떻게 행복하기만 할 수 있었을까. 그 기억의 과정은 따뜻하지만 고통스러운 것이었음에 분명하다. 일제 강제 침탈로부터 백 년도 더 지난 이 시기, 모리사키 가즈에는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그 침탈의 역사를 기억하며, 글을 통해서 속죄를 이야기 하고 있다.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난 것 그 자체가 자신이 감당해야 할 원죄(原罪)라고 말하는 그녀의 마음은 암울한 한일관계에 작지만 강한 빛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대구대학교 인문교양대학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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