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 군인의 명예

입력 2019-07-18 06:30:00

정경훈 논설위원
정경훈 논설위원

6·25전쟁 발발 후 7월 초까지 남한에 급파된 미 육군은 패배를 거듭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장교가 전사하거나 부상당했다. 그 수는 최근 재번역 소개된 T. R. 페렌바크의 '이런 전쟁'에 따르면 남북전쟁 이후 그 어떤 전쟁보다 많았다. 2차 대전 종전 후 군대를 '민주화'한 결과 형편없이 저하된 병사들의 전투력 때문이었다. 병사들은 전투 기술도 미숙했을 뿐만 아니라 싸울 의지도 없었다. 6·25전쟁에 최초로 투입돼 오산에서 북한군에게 뜨거운 맛을 본 '스미스 부대'에는 소총을 조립할 줄 모르는 병사도 있었다.

그래서 장교들은 '나를 따르라'며 최일선에 섰다. 1950년 7월 8일 천안에서 인민군을 막으려 고군분투했던 미 보병 34연대장 로버트 마틴 대령이 그랬다. 마틴 대령은 연대 작전 부사관과 함께 2.62인치 바주카포로 인민군 탱크를 공격했다. 이에 대한 페렌바크의 묘사는 이렇다. "연대장이 할 일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누군가는 해야 했다." 안타깝게도 인민군 전차는 끄떡도 않았고 마틴 대령은 인민군 탱크의 포격에 두 동강 나버렸다.

이런 지휘관 중에는 장군도 있었다. 대전에서 포로가 된 제24사단장 윌리엄 F. 딘 소장이다. 그는 인민군에 밀려 예하 부대들이 후퇴하고 있었는데도 대전에 남아 있었다. 통신이 끊겨 상황 파악이 안 됐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인민군의 전투 능력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딘 소장은 인민군을 관찰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전투에 나서 후퇴하지 않은 부하들을 이끌고 인민군 탱크를 공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바주카 포탄이 단 한 발뿐이었던 데다 이마저 빗나갔고 인민군 탱크는 유유히 지나갔다. 그러자 딘 소장은 자신의 45구경 권총으로 탄창이 빌 때까지 탱크를 쏴댔다. 이렇게 딘 소장의 지휘로 24사단이 버텨주는 바람에 월튼 워커 8군 사령관은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정경두 국방부 장관의 거취가 도마 위에 올랐다. 야당의 해임 요구에 여당은 버티지만 여론은 이미 사퇴로 기울었다. 정 장관도 "자리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한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사실 북한 목선 남하 사건 처리에서 자신은 빠진 채 부하들에게만 책임을 떠넘겼을 때 이미 국방부 장관으로서 권위는 사라져버렸다. 딘 소장과 마틴 대령 같은 군인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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