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산문화회관 기억공작소 '권정호 전'

입력 2019-07-18 10:02:16 수정 2019-07-18 10:16:15

권정호 작가가 자신의
권정호 작가가 자신의 '해골87-1'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1984년 뉴육의 한 거리. 교수직도 잠시 뒤로 한 체 동시대미술을 공부하고 있던 당시 42세의 대구 출신 화가는 거리를 어슬렁거리던 중 길가에 버려진 작은 스피커 3개를 발견하고, 대도시의 소음(소리) 공해에 시달리던 자신의 처지에 견주어 회화의 새로운 구조를 착안하게 된다.

#우연히 의예과를 다니던 형의 책상에 놓인 해골을 보고 죽음에 대한 공포가 밀려왔으나 오히려 형은 해골의 하악골과 상악골의 뼈 구조를 설명하면서 어린 동생에게 자랑하듯 말을 했다. 나중에 화가가 된 동생은 이때의 경험으로부터 '같은 사물이라도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의미가 있구나'를 깨닫고 해골을 오브제로 한 유화에 천착하게 된다.

1970년대와 1980년 초 우리나라 미술의 정체성에 대한 반성과 뉴욕행이라는 새로운 도전에서 자신의 미술을 성장시키려했던 화가 권정호가 '소리'와 '해골' 그림을 그리게 된 에피소드이다.

봉산문화회관 기억공작소Ⅲ은 '권정호의 뉴욕 1985'전을 4전시실에서 9월 29일(일)까지 열고 있다.

작가 권정호(76)는 증폭된 전기신호를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음향에너지로 변환하는 스피커와 마주하면서 평소 고민하던 '그림에서 정신과 육체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의 실마리를 풀기 시작했다. 소리를 전하는 스피커가 가시적 외형의 매체로서 '육체'라면 생각이나 감성을 음성기호로 구성하는 '소리'는 비가시적 내용으로서 '정신'에 대체될 수 있겠다는 착상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때 주운 스피커를 곧장 작업장에 들고 와 캔버스 한복판에 붙이고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붓질을 이어갔다. 그 순간 나는 이 행위가 소리의 개념을 전달할 수 있는 어떤 작품의 형식이 될 수 있음을 직감했다."

스피커와 행위의 개념적 결합을 통해 소리를 작품으로 시각화한 '소리' 시리즈는 이렇게 탄생했다. 권정호의 이런 방식은 추상과 구상의 결합, 나아가 현대미술에서 형상으로의 복귀를 의미했으며 당시 백남준 전수천 변종곤 김차섭 등 재미작가들과 함께 출품한 뉴욕의 '사운드 85'전에서 그의 작품은 미국평론가로부터 '신표현주의'로 명명되기도 했다.

이번 권정호의 '뉴욕 1985'전에서는 당시 스피커 작업 2점과 이후 제작한 대표작 1점이 소개되고 있다.

전시장 정면 천장 높은 벽에 걸린 '소리 85'작품은 스피커를 오브제가 아닌 이미지로 차용한 대표작으로 인간의 과학기술적 성취를 대변하는 이성과 양(陽)의 요소로서 스피커 이미지를 그려넣고 그 주변에 한지를 붙여 다시 찢으면서 거친 붓질을 더해 음(陰)의 요소로서 비가시적인 소리의 영역을 정서적 감성과 함께 전달하고 있다.

'소리'작업에 이어 '해골' 작업은 세 개의 캔버스를 연결해 그린 '해골 85'와 꽉 다문 이를 드러내며 현실의 모순과 억압에 대한 저항을 상징하는 '해골 87-1', 석고로 본떠서 만들 해골을 마치 땅 속에서 발굴해 낸 듯 설치해 전시실 바닥 전체를 세계의 상상덩어리처럼 작품화한 최근작 '해골' 등이 선보인다.

평면회화와 입체 또는 설치미술로 소개되는 그의 '해골'은 '소리'를 상징하는 '스피커'처럼 세계에 반응하는 인간의 소리로서 얼과 마음, 감성을 담는 그릇이자 전달매체이며 실존적 인간의 삶과 죽음, 사회적 사건과 모순, 억압에 대해 반응하고 소통하려는 한국적 리얼리티와 사유들을 시각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인간의 두개골은 삶과 죽음, 시간을 나타내는 소통의 대상이자 인간이 기피하는 충격적 대상이기도 하다. 나는 그런 충격을 통해 절대적 파국을 초시간적 방법으로 구현하고자 노력했다."

작가의 이 말은 곧 인간 억압과 실존 세계의 구조로서 음과 양의 상대적 생각을 떠올리며 정신과 육체, 생성과 소멸, 생과 사 등 불확실한 경계를 인식하고 그 분리와 통합을 실험적 조형의 행위로 드러내고 있음을 웅변하고 있다.

작가는 또 다음 달 중하순쯤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원로작가 회고전을 연다. 이때 '소리'와 '해골' 시리즈를 포함한 작품 100여점을 선보이면 권정호의 작품세계를 보다 면밀히 보여 줄 예정이다. 문의 053)661-3500

글 사진 우문기 기자 pody2@imaeil.com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