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한 병원장님과 미팅할 때의 일이다.
"난 아무나 만나주지 않아. 견적서 보니 황당해서 한번 보자고 했어."
처음 본 원장님은 시원하게 말을 놓으셨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당신 같은 사람은 그냥 공짜라도 좋으니 내 광고 한번 걸어주시라고 나한테 부탁해야 해."
힘들게 만든 작품을 왜 공짜로 써달라고 부탁해야 하는 건지 의아했다. '광고로 인해 발행하는 매출 상승효과는 그냥 공짜로 가져가겠다는 건가?' 황당해서 다시 물었다.
"네?"
"우리 병원 광고하면 다른 병원 광고할 때 이력이 되거든. 당신 보니 이력도 경력도 없는 거 같은데 누가 당신 광고를 써줘?"
광고인이 공들여 만든 광고는 그에게 자식이나 다름없다. 누가 자기 자식을 공짜로 주겠나. 공짜라면 내 광고를 쓸지 안 쓸지 고민 정도는 해줄 것이고 아니면 나가라는 식이었다. 이것이 현실이었다. 처음 광고의 매력에 빠졌을 때 느꼈던 설렘은 현실의 벽 앞에서 헌신짝처럼 내팽개쳐졌다.

한 번은 돈가스집 사장님과 40만 원짜리 광고를 계약했다. 계약서를 쓸 때의 희열을 잊지 못한다. 맨날 공익 광고만 만들다가 광고로 매출을 올릴 수 있다니! 계약서 도장을 찍자마자 나는 무섭게 작업에 매진했다. 우리나라 돈가스집 중에서 최고로 만들어야지 야심에 가득 찼다. 가슴이 벌렁벌렁 뛰며 잠이 들었다.
다음 날 그 사장님께 전화가 왔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계약을 취소하자는 말이었다.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따지고 들었다. 계약은 약속인데 이렇게 쉽게 어기는 게 어디 있냐고. 그랬더니 "그 작은 회사에서 계약서가 뭐가 중요합니까?"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알고 보니 포털사이트에서 우리 회사를 검색하니 가정집이 나왔던 것이다. 제대로 된 회사가 아니라고 판단한 사장님은 다음 날 전화를 걸어 계약을 파기했다.
"우리가 40만 원 투자할 회사가 아니더군."
사장님 말에 나는 이렇게 응수했다.
"스티브 잡스도 마크 저커버그도 처음엔 자기 집 창고에서 시작했습니다. 광고회사가 아이디어가 중요하지 사무실이 중요하지 않습니다"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자존심도 40만원도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억울해서 가슴이 새까맣게 탔다.
나는 세상이 내 아이디어를 봐주길 바랐다. 슬프게도 세상은 그렇지 않았다. 경험이 많아야 했다. 이력이 다양해야 했다. 스펙도 경험도 이력도 없는 사람이 창업했다. 그것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보수적인 '대구'라는 곳에서. 심지어 가질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아이디어'를 팔겠다고 말이다. 그러니 문전박대와 사기꾼 소리 그리고 계약 취소까지 감수해야 했다. 뭔가 상황을 반전시킬 아이디어가 필요했다. 광고인이 작품 안에서만 창의적이여서만 되겠는가. 광고란 결국 주어진 문제를 어떻게 창의적으로 푸느냐가 관건이다. 진짜 광고인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할 때와 마주하게 된 것이다.


㈜빅아이디어연구소 김종섭 소장
'광고인의 생각 훔치기' 저자. 광고를 보는 건 3초이지만 광고인은 3초를 위해 3개월을 준비한다. 광고판 뒤에 숨은 이야기들을 독자들과 공유하기 위해 '김종섭의 광고 이야기'를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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