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미국답지 않은 미국

입력 2019-07-03 15:55:34 수정 2019-07-03 19:02:23

최경철 서울정경부장 겸 편집위원
최경철 서울정경부장 겸 편집위원

"우리가 참는 데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미친 개한테는 몽둥이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그들로부터 언제나 일방적으로 도발을 당하고만 있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1976년 8월 20일, 제3사관학교 졸업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은 연설을 통해 북한을 미친 개에 비유하며 강한 어조로 날을 세웠다.

박 대통령의 이 발언이 나오기 이틀 전이었던 그해 8월 18일, 북한 군인들은 판문점 '돌아오지 않는 다리' 남쪽 유엔군 제3초소 부근에서 미군 장교 2명을 살해했다. 당시 미군 6명과 한국군 5명은 민간인 5명과 함께 전방 시야를 가리는 미루나무의 가지를 제거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북한군은 이들을 기습 공격했다. 이른바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었다.

박 대통령의 날선 발언이 나온 그날, 미국은 7함대에 경계령을 내리면서 항공모함 레이저호를 한반도로 이동시켰고 일본 요코스카항에 있던 항공모함 미드웨이호도 우리나라 해역으로 들어가게 했다. 일본 오키나와에 있던 미군 해병대 1천800명도 한국으로 파견됐다.

정치학자들의 여러 연구 결과물에 따르면 미국은 당시 북한 해안선 인근에 핵폭탄을 투하하는 방안을 비롯해 비무장지대를 공습하는 계획, 북한의 군사시설이나 전략 기간시설을 파괴하는 군사행동 등을 고려했다.

하지만 미국은 도끼만행사건으로 중단된 미루나무 절단 작전을 재개하는 수준에서 사태를 봉합했다. 8월 21일 미루나무 절단 작전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북한은 아무런 대항 작전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오후 김일성은 북한 인민군 최고사령관 자격으로 휴전 이후 사상 처음으로 유감 표명 메시지를 스틸웰 유엔군 사령관에게 전했다. 미군 2명을 살해한 북한의 모험적 군사행동에 대한 응징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채 미루나무 절단으로 끝이 났다.

사실 미국은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어 개성을 점령한 뒤 연백평야 깊숙이까지 진출, 수도 서울이 서부전선과 지리적으로 너무 가까운 안보상의 위협 요인을 제거할 계획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군사적 모험을 저지르는 북한에 대해 '강압'을 실행하지 못했다. 확전에 대한 두려움이 미국을 주저하게 만든 것이다.

유감을 표명하는 메시지를 내면서 위축된 모습을 보였지만 김일성은 도끼만행사건을 통해 중요한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미국은 한반도에서 다시 한 번 전쟁을 벌일 의사가 없다는 점을 김일성이 확인한 것이다. 도끼만행사건 처리 과정에서 미국의 '강압'은 분명한 한계를 드러냈고 김일성은 이를 정확하게 인식했으며 핵무기 개발이라는 또 다른 모험적 행동의 씨앗을 만들었다.

판문점에서의 남북미 3국 정상 회동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직후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새로운 협상에서 미국이 북핵 동결에 만족할 수도 있다'는 제목의 기사를 냈다. 트럼프 행정부의 생각은 핵 동결이며 현 상태를 유지하면서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라는 게 NYT의 설명이다.

지금을 봐도, 과거를 봐도, 대한민국 안보의 든든한 후원국 미국은 결정적 국면에서 용맹스러운 흑기사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집권 이후 이러한 현상은 더 심화되고 있다. '미국답지 않은 미국'을 보면서 우리 정부는 과연 어떤 대처를 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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