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요리 산책] 정구지 김치

입력 2019-07-03 18:00:00

이른 봄부터 가을까지 계속 먹을 수 있는 채소가 정구지이다. 베고 난 후 며칠 지나면 보란 듯이 자라있고, 거름 주고 비 내리면 부쩍부쩍 더 자란다. 미처 베지 못해 웃자란 것은 이발하듯 깨끗이 잘라버려야 다시 연한 순을 먹을 수 있다.

솔, 구채(韭菜), 난총(蘭葱) 등 불리는 이름도 많다. 한자로는 해(薤), 구(韭)라 하는데, 구(韭)는 정구지 잎이 땅 위로 돋는 모양을 본떴다. 오래 살고, 여러 번 잎을 잘라도 죽지 않으며, 겨울에 추위를 견뎠다가 봄에 다시 돋아난다 하여 구(韭)라고 한다.

정구지(精久持)는 부부간의 정을 오래도록 유지해 준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정구지의 맵고 따뜻한 성질은 생식기능을 원활하게 해준다. 그뿐만 아니라 남자에게 좋다 하여 기양초(起陽草), 과붓집 담을 넘을 정도로 힘이 생긴다 하여 월담초(越譚草), 운우지정을 나누면 초가삼간이 무너진다고 하여 파옥초(破屋草), 장복하면 오줌 줄기가 벽을 뚫는다고 파벽초(破壁草)라고도 불렸다. 그만큼 몸에 이롭고, 가까이에서 흔하게 먹을 수 있는 채소라 전해오는 이야기도 많은 것 같다.

정구지만 있으면 끼니때 반찬 걱정을 줄일 수 있다. 집 앞 텃밭에도 담장 옆에도 정구지는 쑥쑥 자랐다. 어머니는 정구지 김치를 담그고, 된장 풀어 국을 끓였다. 김치가 질리면 생채 무침을 하고, 끓는 물에 살짝 데쳐 숙채 무침도 만들었다. 가마솥에 밥을 지을 때면 정구지에 콩가루나 밀가루를 묻혀서 쪄낸 다음 양념을 넣어 무쳤다. 장마철에 기분마저 눅눅해 지면 정구지 부침개를 부쳤다. 고소한 기름 냄새가 집안을 점령했다. 뜨끈한 멸치 우린 국물에 애호박 채 썰고, 부추 한 줌을 같이 넣어 칼국수를 끓여도 맛난다. 아버지는 부침개를 안주 삼아 막걸리 한잔 곁들이며 쏟아지는 빗줄기를 담담하게 바라보았다. 장마철이라고 할 일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잠시라도 쉼을 가질 수 있는 시간이었다.

조선 시대 제사, 행사 등 절차에 대해 기록한 '세종오례의'(世宗五禮儀)에 보면 '제사상의 첫째 줄에 정구지 김치를 놓고 무김치가 그다음이며, 둘째 줄에 미나리 김치를 놓는다'라고 되어 있다. 음식을 연구하는 여러 보고서에도 배추김치보다 정구지 김치에 몸에 좋은 영양소가 많다고 한다.

정구지 반찬은 간편하게 만들 수 있다. 정구지 한 단 사서 양념에 버무리면 김치가 되고, 그도 귀찮으면 무침으로 만들면 된다. 밀가루 훌훌하게 개어 땡초 두어 개 썰어 넣고 부침개를 만들면 흐린 날 입맛 돋우는 데 그만이다. 땡초 맛에 호호거리며 눈물 한 방울 찔끔거리면 기분을 다스리는 명약이기도 하다.

'韭(구)'는 '九(구)'와 음이 같다. '구' 반찬 세 가지는 27가지 반찬이 된다는 옛말이 있다. 3×9=27, 이십칠종(二十七種)은 변변치 않은 음식을 일컬었다. 그러나 비록 변변치 못한 반찬을 먹을망정 27개씩이나 먹었으니 잘 먹는 것이나 진배없다는 뜻이 될 것이다.

나이 들어 부부간에 정 낼 일은 없어도 정구지 반찬으로 입맛 낼 일을 만들어 본다.

Tip: 부추는 성질이 따뜻하여 몸에 열이 많은 사람보다는 몸이 냉한 사람이 먹으면 좋다. 숙채나 국을 끓일 때는 짧은 시간에 데치거나 먹기 직전에 넣어야 향기를 살릴 수 있다.

노정희 요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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