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에] 네 편 내편 편 가르기

입력 2019-06-30 16:01:01 수정 2019-06-30 18:37:51

권은태 (사)대구콘텐츠 플랫폼 공동대표

권은태 (사)대구콘텐츠 플랫폼 이사
권은태 (사)대구콘텐츠 플랫폼 이사

'113수사본부'는 꽤 인기 있는 TV 드라마였다. 1970년대부터 80년대 초까지, 안방극장에 모여 앉은 이들에겐 우리의 안위와 평화가 마치 이로써 유지되는 것처럼 보였다. 매주 한 번씩 우리 편인 '수사본부'는 우리의 적인 '북한 간첩'을 잡았다.

그땐 그랬다. TV도 그렇고 학교에서 배우는 것도 그렇고 대체로 둘로 나눠 놓고 보면 쉽고 빠르게 이해가 되었다. 내 편인지 네 편인지, 그래서 둘 중 누가 이기고 지는지를 보며 거기서 교훈을 얻으면 되는 거였다. 이때, 언제나 우린 정의, 상대편은 곧 반대편이며 적이자 악이었다. 그리고 그 악의 정점엔 북한 공산집단이 있었다. 그러니 싸워서 이겨야 했고 싸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그러고 보면 나라도 두 부류, 즉 우리처럼 정상적인 나라와 북한처럼 공산당이 지배하는 나쁜 나라가 있었다. 이스라엘은 좋은 나라, 아랍 국가들은 그렇지 않은 나라라는 도식이 부록처럼 따라다니긴 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세계평화를 위해, 정의구현을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공산당을 무찌르는 거였다. 모두 함께해야 했고 어린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열심히 반공 표어를 만들었고 미술시간엔 공산군이 국군의 총칼에 찔려 죽는 장면을 그렸다. 물론 피가 흐르는 것도 붉은색 크레파스로 정성들여 그렸다. 그때가 열 살 안팎이었다.

드라마를 보면 북한은 매주 간첩을 내려보냈다. 여기저기 '의심나면 다시보고 수상하면 신고하자'는 글귀가 붙어 있었다. 그러니 봄이 온다고 해서, 꽃이 핀다고 해서 마냥 그런 것만 쳐다보고 있어선 안 될 일이었다. 그보단 혹시라도 주변에 수상한 사람이 있는지, 동네 어귀에 북한이 날려 보낸 삐라가 떨어져 있지는 않은지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착한 아이라면 그래야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나이가 들면서 정의와 불의, 단순했던 양자대결구도의 세상에 갑자기 새로운 전선들이 생겨났다. 세상만사를 '건전한 우리'와 '공산 세력' 간의 대결로 보는 이들은 여전했다. 그런데 일각에선 깨어 있는 국민과 그렇지 않은 국민이 있다고 했다. 또 한편에선 우리나라를 '식민지 반봉건사회'로 볼 것인지 아니면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로 볼 것인지를 두고 치열한 논쟁을 벌이며 세력을 다투었다. 다자 대결 구도가 된 것이다.

그래도 따지고 보면 이들 또한 이쪽 아니면 저쪽, 둘로 나뉘어 싸우긴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누가 무엇을 주장했는가보다 세간의 관심은 오랜 습관처럼 둘 중 누가 이겼는가에 더 쏠렸다. 그랬다. 누구도 세상을 있는 그대로 말하지 않았고 누구도 세상을 계획대로 바꾸지 못했다. 그게 1980년대였다.

그리고 1990년대, 작가 주인석이 "나는 식민지 반봉건사회에 태어나서, 제3세계적 개발독재사회에서 교육받고, 예속적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에서 젊은 날을 보냈으며, 이제 포스트모던 사회로 이민가고 있다. 나는 혼란스럽다"라고 한 그 90년대도 이미 지난 지 오래다.

2019년 지금, 새로운 연결, 새로운 세상, 새로운 인류가 등장했다. 거리엔 휴대폰을 신체의 일부처럼 여기는 포노사피엔스(Phono Sapiens)가 넘쳐난다. 이들은 전에 없던 방식으로 생각하고 전에 없던 방식으로 움직인다. 그런데 이토록 새로운 세상, 새로운 시대에도 둘로 나뉘어 싸우는 건 여전하다. 오히려 여느 때보다 극단적이다. 그리고 싸우는 방식이 전에 없이 야비하고 전에 없이 졸렬하며 전에 없이 비겁하다.

권력을 지닌 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싸움을 선동하고 권력을 좇는 자들이 이를 추동한다. 그들은 나라야 망하든 말든 국민이야 죽든 말든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워 때론 교묘하게 때론 노골적으로 싸움을 부추긴다. 언론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이를 '보수우파'와 '진보좌파'의 대결이라 하지만 그럴 리 없다.

수도권의 한 라디오 방송 진행자가 방송 내내 모든 것의 앞에 보수 아니면 진보를 갖다 붙이기 전까지 언론은 보수정당, 진보정당이라는 말조차 잘 쓰지 않았다. 그때 그랬던 것처럼 이들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부끄러움을 모른다. 그저 보는 이가 낯 뜨거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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