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고궁박물관 ‘문예군주를 꿈꾼 왕세자, 효명’ 특별전에 소환된 효명세자
22세에 요절한 세자, 정조를 닮은 용모와 정치 족적이 순조실록에 기록돼 있어
지난달 28일 국립고궁박물관은 '문예군주를 꿈꾼 왕세자, 효명' 특별전 개막을 알렸다. 순조와 순원왕후의 맏아들로 태어난 효명세자(1809~1830)에 대한 전시다. 22세의 짧은 생을 살다 간 그가 남긴 시문과 활동 공간이던 창덕궁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이번 특별전에는 '학석집'(鶴石集) 등 효명세자가 지은 시집과 문집, 편지글 등 110여 건의 유물이 전시되고 있다. 특히 창덕궁 궁궐 전각 중에는 효명세자와 관련된 곳이 많다. 애련지라는 연못 옆의 의두합(倚斗閤)은 효명세자가 공부하던 독서 공간이었다. 의두합에서는 북향의 차가운 건물에 머물며 정치적 구상을 했던 세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어리석음을 일깨우는 공간'이라는 의미가 담긴 폄우사도 세자가 자주 머물던 곳이었다. 창덕궁 후원 규장각 근처에 세운 연경당(演慶堂)은 세자가 부친 순조를 위해 지은 건물이다. 창덕궁 곳곳에서 세자의 이야기가 배어 나온다.
효명세자는 왕실의 기대를 크게 받던 인물이었다. 창덕궁 대조전에서 태어나 1812년 4세 때 왕세자로 책봉됐다. 1819년(순조 19년) 11세의 나이로 풍양 조씨 조만명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게 되는데 이 세자빈이 신정왕후다. 훗날 고종을 왕으로 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인물이다.
효명세자가 장성하자 순조는 각종 행사에 세자를 동행시켰다. 1827년에는 19세의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할 정도로 신뢰가 컸다. 대리청정을 맡긴 건 젊은 세자의 개혁 성향이 조정에 필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즈음 안동 김씨로 대표되는 세도정치의 벽이 두꺼웠던 탓이었다.
대리청정을 맡은 직후 효명세자는 순조의 기대에 부응했다. 안동 김씨 세력의 핵심들을 정계에서 축출하거나 권한을 약화시키는 데 주력했다. 대신 남인, 소론 등 반외척 세력을 정계로 복귀시키는 탕평 인사를 했다.
효명세자는 무엇보다 정조를 닮고자 했다. 정조처럼 능행(陵幸)을 민심 파악과 군사 훈련의 기회로 삼았다. 백성들이 왕에게 청원하는 방식이던 상언(上言)과 격쟁(擊錚) 역시 적극 활용했다. 공교롭게도 순조실록은 효명세자가 용모부터 정조를 꼭 빼닮았음을 증언해 주고 있다. 실록은 '세자는 이마가 우뚝 솟은 귀상에다 용의 눈동자로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으므로 궁중의 상하가 모두 말하기를, 정조대왕과 흡사하다고 하였다'고 했다.
효명세자는 대리청정 기간 동안 크고 작은 연회를 총 11회 열었는데 대부분 순조와 어머니 순원왕후를 위한 잔치였다. 세도정치의 파행을 극복하고 왕 중심의 지배질서와 왕의 권위를 강화하려는 정치적 목적이 컸다.
이때 궁중 행사를 직접 관장하면서 악장과 가사를 만들고 궁중 무용인 정재무(呈才舞)를 다수 창작했다. '춘앵전'을 비롯해 '망선문'(望仙門), '경풍도'(慶豊圖), '만수무'(萬壽舞) 등이 대표적이다.
세도정치의 벽을 뚫고 정치와 문화 면에서 왕권의 강화를 꾀하던 효명세자의 대리청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1827년 2월 18일 시작된 대리청정이 1830년 5월 6일 세자의 급서로 막을 내린 것이다. 효명세자가 22세의 나이로 요절하면서 조선 왕실에는 불운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순조 사후 왕위는 효명세자의 아들인 8세의 헌종이 계승했다. 최연소 왕의 즉위는 잠시 주춤했던 세도정치가 활개를 치는 계기가 되었고 왕실의 권위는 더없이 추락하게 된 것이다.
22세라는 짧은 생이지만 왕실의 부흥을 위해 분투한 효명세자를 현재에 소환한 국립고궁박물관의 특별전, 그리고 그의 자취가 잘 남아 있는 창덕궁 후원의 연경당과 폄우사 일대를 찾아보며 효명세자를 기억해 보기 바란다.
댓글 많은 뉴스
나경원 "李 장남 결혼, 비공개라며 계좌는 왜?…위선·기만"
이 대통령 지지율 58.6%…부정 평가 34.2%
트럼프 조기 귀국에 한미 정상회담 불발…"美측서 양해"
김기현 "'문재인의 남자' 탁현민, 국회직 임명 철회해야"
주진우, 김민석 해명 하나하나 반박…"돈에 결벽? 피식 웃음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