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4년 연산군은 생모 폐비 윤씨의 사사(賜死)에 관련된 인물들을 처형했다. 폐비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한 이들은 물론 사약으로 비상을 추천했거나 사약을 들고 갔던 신하들에게 죽음을 내렸다. 산 자는 조각을 내 죽였고 죽은 자는 관을 부수고 시체를 조각냈다. 사약을 들고 갔던 한 신하의 부인이 "우리 자손은 씨도 남지 않겠구나"란 말이 현실이 됐다.
연산군 입장에서 보면 생모에게 사약을 들고 간 신하는 적폐(積弊)를 넘어 원수였을 것이다. 그러나 신하 입장에서 보면 사약을 전하라는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의 명을 거역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불충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때 그 자리를 맡았던 것이 불행한 죽음의 씨앗이 되고 말았다.
여당 원내대표와 청와대 정책실장의 "관료가 문제"란 말은 일정 부분 타당하다. 바짝 엎드린 채 열심히 일하지 않고 소신도 없는 공직사회 문제를 지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근본 문제는 다른 데 있다. 공무원들을 이렇게 만든 것은 청와대 책임이 크다. 문재인 정부 들어 전·전전 정권 정책에 관여한 관료들을 '부역자'로 몰아세운 것이 이 같은 현상을 초래한 것이다. 경제 부처 공무원들이 정책 보고서를 만들 때 '과수'(과장 수정), '국수'(국장 수정) 등 누구 지시로 수정했는지를 표기한 파일을 만들어 두는 것은 후환을 당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의 하나다.
적폐청산 과정에서 공무원을 옭아매는 데 '전가의 보도'처럼 쓰인 직권남용죄가 이제 집권 세력을 향한 부메랑이 됐다. 자유한국당 곽상도 의원은 문재인 대통령을 직권남용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김학의 전 차관 사건과 관련 문 대통령이 자신을 겨냥한 수사 지시를 내린 것이 직권남용에 해당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북한산 석탄 밀반입 의혹과 관련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혐의로 한국당에 의해 검찰에 고발됐다.
공무원이 '정권 교체 리스크'까지 고려해서 일할 수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정권 입맛에 따라 이현령비현령식으로 공무원을 단죄하는 행태부터 사라져야 한다. 21세기에 연산군 때와 같은 일이 벌어져서야 말이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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