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 비선 실세

입력 2019-06-11 06:30:00

조향래 논설위원
조향래 논설위원

조선시대 상궁 김개시(金介屎)는 광해군을 어린 시절부터 돌봐온 인연으로 왕의 신임이 두터웠다. 왕실의 대소사를 좌지우지했는데, 드러내놓고 매관매직을 일삼는 등 해악이 컸다. 대신들이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도리어 역공을 당하곤 했다. 광해군의 실정을 부추겼던 김개시는 인조반정이 일어나고서야 제거되었다.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정책 결정을 황후 알렉산드라에게 의지했다. 그런데 그 황후를 배후 조종한 인물은 라스푸틴이라는 수도승이었다. 최면술을 활용한 신비주의 종교인이었던 그는 황태자의 병을 치료한 인연으로 황후에게 '성자' 대접을 받았다. 전쟁과 혁명의 경고음을 무시한 채 국정을 농단하던 라스푸틴은 귀족들에게 암살되었고, 황제 일가족의 최후도 성큼 다가왔다.

진령군이라는 무당은 임오군란으로 충주에 피신해 있던 명성황후에게 접근해 환궁을 예언하며 국모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황후의 절대적인 신임으로 궁궐에 들어와 정사에 관여하게 되자, 모든 벼슬아치들이 그녀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고종과 황후를 쥐락펴락하며 매관매직을 일삼고 굿판을 벌여 국고를 탕진하는 요녀를 충신들이 목숨 걸고 탄핵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천출의 무당으로 군호(君號)까지 받은 진령군 또한 인과응보의 사슬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 문제는 망조가 짙게 드리운 조선의 운명이었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인가. 엉뚱한 여인이 무도하게 국정에 관여하면서 사익을 챙기다가 국가와 국민을 일대 혼란에 빠트린 일이 또 불거졌다. 최근 공개된 녹음 파일에서 추가로 드러난 박근혜 정부 당시 최순실의 국정 개입 정황은 참담하다. 누가 대통령이었는지…?

역사라는 거대한 수레바퀴가 어찌 이 같은 근거 없는 샤먼과 하찮은 인간에 의해 농락당할 수가 있는가. 자격 없는 사람들에게 국가의 운명을 맡겼을 때 어떤 위기가 닥쳤는지, 역사는 준엄하게 가르치고 있다. 영원한 재야(在野)운동가 장기표 씨는 '박근혜에게 최순실이 한 명이라면, 문재인에겐 열 명일 것'이라고 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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