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대구적십자병원 원장
한국전쟁 뒤 우리 동네에는 중국 요릿집이 대 여섯 군데 있었다. 시청, 16 헌병대. 육군본부(나중에 2군 사령부가 들어온다.), 남선 전기(한전), 도서관 등의 관공서가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에 '영남반점'이 가장 컸다. 아침에 문을 열면 주인 영감님이 느린 걸음으로 노고지리 통을 들고 나와 처마 밑에 거는 게 일과의 시작이다. 그 댁 할머니는 발이 애기 발처럼 작아서 걸음을 옳게 걷지를 못했다. 젊은 여자들 발은 모두 멀쩡했다. 어른들 말로 발을 헝겊으로 꽁꽁 묶는 전족(纏足) 탓이라고 했다. 중국에는 여자가 귀해 도망을 못 가게 그랬다는 것인데 나중에 책을 보니 성적 자극을 위한 목적도 있었다고 나와 있었다.
우리 동네 중국집은 주로 식사와 요리만을 팔았는데 중앙통 쪽으로 가면 식사 외에 빵이나 호떡도 만들어 팔았다. 칼 빵, 계란 빵 등은 전날 미리 만들어 두었다가 팔았지만 만두나 앙꼬 빵, 호떡 등은 주문하면 그 자리에서 만들어 주었다. 종로의 '영생덕'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옛 영업 스타일이 지속되고 있다. 키네마 극장(한일극장의 전신)앞 중국집도 주문받고 현장에서 만두를 만들었다. 둥근 통나무를 세로로 자른 뒤 도마로 쓰고 있었다. 딴 음식은 주방에서 만들었는데 호떡과 앙꼬 빵과 만두는 홀에서 만들었다. 주방장이자 주인인 인 남자가 관운장 청룡도 닮은 큰 중국 칼을 두 개를 들고 휘두르면 도마 위에서는 만두 소 재료인 돼지고기, 두부, 부추, 숙주, 표고, 달걀, 양파 등이 춤을 추고 있었다. 사람 좋은 그는 만두 만들 때 노래를 불렀다. 단골들은 그를 '짱깨'라고 불렀다. 짱깨는(장궤(掌櫃)-짱꾸이)는 타이완계 화교 출신 사장의 존칭이라고 하는 데 그 사람은 그 호칭을 좋아하지 않았다.
1904년 경부선 철도가 개설되면서 중국 산둥성 사람들이 대거 한국으로 몰려왔다고 한다. 인천서 1905년 '공화춘'이 문을 열고 자장면을 팔기 시작했고 대구는 1920년대 대구역 뒤에서 '왕조성'씨가 '경성반점'이란 이름으로 중국음식점을 개점하였고 현재까지 영업한다. 1930년대에는 모임도 하고 잔치도 하는 규모가 크고 고급 중국집인 '군방각'이 문을 연다. 나중에 '기린원'도 그런 영업을 한다.
1930년에 대구의 화교는 1,384명이었고 1967년에는 3,108명까지 늘어났다. 화교들은 음식점 외에도 양조장, 주물공장, 농장과 기타 유통업을 하여 큰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이런 욱일승천(旭日昇天)하는 화교들의 상업 활동에 두려움은 느낀 한국정부는 1950년 창고봉쇄령과 화폐개혁, 1962년에는 외국인 토지 소유금지 등의 법을 만들어 화교들의 경제활동을 옥죄는 가혹한 정책을 편다. 1970년에는 한동안 중식당에서 쌀밥도 팔지 못하게 한 적도 있다. 같은 해 따가운 여론에 마지못해 외국인에게 주거용 200평, 영업용 50평을 허용하게 되었지만 그런 정도의 토지로는 큰 사업을 할 수가 없었다. IMF이후에야 외국인 토지소유 제한이 풀어지지만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이미 딴 나라로 다 떠난 뒤였다. 서성로에 예식장 기린원(얼마 전 폐업함), 종로에 만두 집 영생덕, 동성로에 야끼우동 중화반점, 수성구에 전가복 연경반점 등은 나름대로 특성화를 꾀하여 현재까지 살아 남아있었다.
키네마 극장 앞 짱깨가 부르던 노래는 "몽롱한 달빛, 밤 안개에 덮여 있는 대지/ 나의 꿈속의 임이여, 그대는 어디에/ 바다 물결치는 소리 아득히 들려오고, 솔바람도 구슬피 호소하는듯/ 나의 꿈속의 임이여, 그대는 어디에/ 장미 없는 봄날이요, 현 끊어진 하프라/ 사랑하는 그대 없는 이 세상은 하루가 일 년 같아라." -'꿈속의 사람'.(노래 채금, 우리나라에서 현인선생이 '꿈속의 사랑'으로 번안해서 부른 노래), 이 노래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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