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톈안먼 시위 무력진압에 中 군부도 씻을 수 없는 상처"

입력 2019-06-04 15:14:09

문화대혁명 때도 중립 지켰던 軍, 시위 군중 무자비하게 진압
서면 명령 없이 '구두 지시'로 진압 이뤄져 정당성도 의문

'6.4 톈안먼 민주화 시위'(톈안먼 사태) 30주년을 맞은 4일 중국 베이징의 톈안먼 광장에서 공안들이 차량 안에 앉아 바깥의 시민들을 살피고 있다. 연합뉴스

'6.4 톈안먼 민주화 시위'(톈안먼 사태) 30주년을 맞은 4일 대형 마오쩌둥 초상화가 내걸린 중국 베이징의 톈안먼 광장에서 공안들이 촘촘히 경비를 서고 있다. 연합뉴스

톈안먼(天安門) 민주화 시위가 30주년을 맞은 가운데 시위진압에 동원됐던 인민해방군도 당시 사태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고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가 4일 보도했다.

톈안먼 사태는 1989년 6월 4일 민주화와 정치개혁을 요구하면서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시위를 벌이던 대학생과 시민들을 중국 정부가 탱크와 장갑차를 동원해 무자비하게 유혈 진압한 사건을 이른다.

SCMP에 따르면 인민해방군은 중국 현대사 최대의 정치적 동란으로 여겨지는 마오쩌둥(毛澤東)의 문화대혁명 때도 정치적 중립을 지켜 중국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으나 톈안먼 시위진압에 동원되면서 결코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게 됐다.

당시 시위 진압에 나선 군은 처음에 공중으로 총을 발사했으나 나중에 시위 군중을 향해 직접 발포했으며, 이로 인해 '런민쯔더빙(人民子弟兵·인민의 아들딸로 이뤄진 군대)'의 이미지는 하룻밤 사이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인민해방군 군사과학연구원에서 근무했던 한 연구자는 "인민해방군은 깊은 수치심을 품고 있을 것"이라며 "톈안먼 사태는 언젠가는 재평가되어 궁극적인 책임은 (진압) 결정을 직접 실행한 군 지휘부에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톈안먼 시위진압의 정당성을 뒤흔드는 것은 진압 명령이 서면 명령이 아닌 '구두 지시'로 이뤄졌다는 사실이다. 당시 최고 실권자이자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었던 덩샤오핑(鄧小平)의 구두 지시를 받아 강경파였던 양상쿤(楊尙昆) 중앙군사위 부주석이 전면에 나서 군을 동원해 시위대를 유혈 진압한 것으로 전해졌다.

베이징시는 톈안먼 사태로 시민과 군경 241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지만, 기밀 해제된 영국 외교 문서를 토대로 당시 총에 맞아 사망한 학생, 시민, 군인이 1만 명을 넘는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톈안먼 시위진압에 동원된 군대의 규모는 공개되지 않았으나, 미국 학자 우런화는 20만 명의 군이 동원됐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김지석 선임기자 jiseok@imaeil.com·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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