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 카메라 시대, 안판석 감독의 현실 멜로
안판석 감독이 '봄밤'을 들고 돌아왔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를 쓴 김은 작가에 정해인이 출연했다는 점에서 '봄밤'은 전작과 비교될 수밖에 없다. 안판석 감독의 멜로는 무엇이 다른 것이며 그것은 왜 비슷한데도 또 사람들을 빠져들게 만드는 걸까.

◆<봄밤>과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는 다른가
안판석 감독과 김은 작가 그리고 배우 정해인. MBC 수목드라마 <봄밤>의 라인업은 여러모로 JTBC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 유사성을 확증이라도 하듯, 조연들 중 많은 배우들이 이른바 '안판석 사단'으로 불리는 이들로 채워졌다. 길해연, 주민경, 오만석, 서정연, 김창완 등이 그들이다. 드라마의 색깔도 다르지 않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가 커피 프랜차이즈업체에서 일하는 연상녀 윤진아(손예진)와 게임업체에서 일하는 연하남 서준희(정해인)의 '현실 연애'를 담아냈던 것처럼, <봄밤>도 약사 유지호(정해인)와 사서 이정인(한지민)의 '현실 연애'를 담고 있다. 게다가 이들의 사랑을 방해하는 요소들로 기성사회가 가진 편견이나 억압을 내세우고 있는 면도 유사하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에서 이들의 사랑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요소로 등장한 건 윤진아의 엄마였고 그 이유는 서준희가 부모 없이 자란 아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봄밤>에서도 아직 등장하진 않았지만 유지호가 아이를 가진 비혼부라는 점은 유사한 장애요소로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는 이정인의 아버지 이태학(송승환)은 이사장의 아들과 결혼을 강권하는 인물이다. 딸이 유지호 같은 비혼부를 사귀는 것 자체를 탐탁찮게 여길 여지가 다분하다.
이쯤 되면 대중들은 '자기복제'를 의심하게 된다. 너무 비슷한 설정의 이야기를 직업과 배우들만 조금 바꿔 변주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심이다. 실제로 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은 유지호가 가진 아이가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의 윤진아가 낳은 아이가 아니냐는 농담 섞인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결국 이정인과 유지호는 조금씩 가까워지고 사랑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서 이 사랑을 가로막는 사회적 편견과 억압들이 등장할 것이다. 그걸 극복하고 사랑해나가는 이야기. 어찌 보면 <봄밤>의 이야기는 다소 뻔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빠져드는 건
그런데 이렇게 뻔하게 느껴지는 스토리와 전작의 기시감에도 불구하고 <봄밤>은 의외로 흡인력이 강하다. 아주 소소하고 자잘한 이야기들이 펼쳐지고 있지만 한 번 보면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몰입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것이 이 드라마의 주인공들인 한지민과 정해인이라는 배우의 아우라 때문이 아니냐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몰입감이다. 그것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그것은 안판석 감독의 연출에서 나온다. 이정인과 유지호가 처음 만나는 그 시퀀스를 예로 들어보면 안판석 감독의 섬세한 연출이 별 일도 벌어지지 않는 사건을 아주 특별하게 만들어내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전 날 친구 집에서 과음을 하고 늦게 일어나 부랴부랴 나온 이정인이 술 깨는 약을 사먹으러 유지호가 약사로 있는 약국으로 들어오고, 약을 달라고 하자 돈도 지불하지 않은 이정인에게 손수 약병을 따주는 유지호의 모습이 그렇다. 그 장면에서 유지호의 배려 가득한 성품이 슬쩍 드러나고, 그 배려심은 마침 지갑을 가져오지 않은 이정인에게 그냥 가라며 오히려 돈 몇 만 원을 챙겨주는 모습을 통해 더 확실해진다. 그 아무 것도 아닌 일이 그러나 이정인에게는 달리 보이게 된다. 그것은 이정인의 주변인물들과의 비교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 이태학은 이정인의 언니를 사랑도 없는 치과의사에게 결혼시켜 불행하게 만든 인물이다. 이정인은 그래서 자신을 배려하지 않는 외부인들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다. 거꾸로 자신을 배려하는 인물에 대해서는 남다른 감정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가 유지호와의 첫 만남에서 약병을 따주는 한 모습만으로도 어느 정도 호감을 갖게 되는 이유다.
안판석 감독의 카메라는 군더더기 없이 담담하게 '연애의 풍경'을 담아내지만, 그 안에는 보이지 않는 감정의 기류들을 포착해낸다. 이정인과 유지호가 만나고 헤어지는 걸 반복하는 그 과정들은 별 사건이 없어 보이지만, 카메라는 그 과정에서 오고가는 감정의 기류들을 담아낸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에서 비 내리는 날 우산을 함께 쓰고 걸어가는 남녀의 모습만으로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을 연출해낸 것처럼, <봄밤>에서는 눈 내리는 날 만나 함께 걸어가는 모습만으로도 그 감정을 포착해낸다. 안판석 감독은 이러한 연출을 통해 우리가 만나게 되는 사랑이 사건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감정의 변화 때문에 주변 풍경들을 송두리째 달리 보이게 만든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실제가 그렇지 않은가. 눈에 콩깍지가 끼면 달리 보이는 세상이란.

◆관찰 카메라 시대와 안판석 감독의 현실 멜로
그래서 <봄밤>은 어떤 시각으로 이 드라마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너무나 다른 반응들이 나올 수 있다. 즉 스토리 중심으로 보면 이 드라마는 너무 뻔한 느낌일 수밖에 없다. 그 흔한 멜로의 구도를 거의 그대로 가져와 반복하고 있는 것이고, 심지어 전작이었던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를 거의 떠올릴 수 있는 그런 스토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토리가 아니라 그 과정들 속에서 벌어지는 감정의 변화들을 좀 더 세밀하게 들여다보려 한다면 <봄밤>은 그 자체로 흥미진진한 드라마로 다가올 수 있다. 예를 들어 이정인이 유지호에게 "친구 하자"고 말할 때 그에게 마음이 있는 유지호가 "그럴 수 없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이들의 감정을 들여다보는 건 액면의 대사만으로는 느낄 수 없는 설렘이 묻어난다. 친구가 별거냐며 가끔 만나 밥 먹고 이야기 나누는 것이라고 말했던 이정인이, 자기 동생이 친구라고 만나는 남자에 대해 과민반응을 보이는 장면은 그의 숨겨진 속내를 보게 만드는 재미가 있다. 사실 친구가 별 거냐고 말은 했지만 그건 이정인이 유지호에 대한 남다른 마음이 있었던 걸 숨기려는 거짓말이었다는 걸 그 소소한 대사들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건 마치 드라마를 보는 게 아니라 이른바 관찰 카메라 프로그램을 보는 것만 같다. 카메라를 들이대고 한참을 자세히 보다보면 그 행동 하나에서 말 한 마디에서 느껴지는 속내들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가 별거 아닌 것처럼 그저 스쳐지나가며 했던 말들이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관찰 카메라 형식의 프로그램들은 이런 일상의 말들과 행동들을 콕콕 집어 자막과 편집으로 강조해 보여줌으로써 '보통의 일상을 특별한 체험'으로 만들어 준다. 안판석 감독의 멜로는 그 섬세한 시각 때문에 마치 관찰 카메라가 가진 '특별한 일상'을 담아내게 되었다.
하지만 관찰 카메라 프로그램과 드라마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것은 관찰 카메라가 하나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일상의 도화지 위에 자막과 편집을 통해 덧칠을 해줌으로서 좀 더 명확한 이야기를 담아내지만, 드라마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물론 드라마도 연출의 문법이라는 것이 있어 카메라가 어떤 위치에서 어떻게 피사체를 잡아내는가가 갖고 있는 의도가 있기 마련이다. 영상을 공부한 이들이라면 그 의도를 파악해가며 장면들이 갖는 숨겨진 이야기들을 읽어내겠지만, 보통의 시청자라면 그저 소소한 일상으로 지나칠 수도 있는 일이다.
어쨌든 안판석 감독은 이른바 관찰 카메라 시대에 자신만의 현실 멜로를 하나의 스타일로 갖게 됐다. 그는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에 이어 이번 <봄밤>에서도 그 세계의 재미를 또다시 추구하고 있다. 과연 시청자들은 그 '관찰의 묘미'를 공감할 수 있을까. 결과가 사뭇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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