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요리 산책] 더덕 산적

입력 2019-05-29 18:00:00

미당 선생은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라고 했다. 내게도 유년을 키워주고, 지금까지 마음을 넉넉하게 채워주는 자양분이 있으니 바로 고향산천에 대한 기억이다.

바라보고 둘러봐도 첩첩이 포개진 산, 올려다보면 파란 하늘, 산촌의 화원은 신비한 보물찾기 놀이터였다. 집 앞에는 개울, 개울 건너면 논과 밭, 몇 뙈기밭을 지나면 바로 산이었다. 개울 둔덕과 산어귀에는 먹을거리가 많았다. 뿌리를 캐든, 꽃과 줄기를 꺾든, 열매채취 하든, 모든 행위는 놀이의 연장이었다. 어른들을 통해 식물 이름을 알아갔다. 노루오줌풀, 홀아비꽃대, 까치수염, 족두리풀, 개불알꽃, 금낭화…. 소가 먹는 풀은 이롭고, 먹지 않는 풀은 해롭다는 것을 누누이 들었다.

이쁘지 않은 꽃이 있으랴만, 개중 더덕꽃이 눈길을 당긴다. 덩굴에 조롱조롱 주머니 모양으로 매달린 꽃망울, 바깥쪽으로 살짝 말아 올린 다섯 갈래의 연녹색 꽃잎이 앙증스럽다. 종 모양의 통꽃(합판화, 合瓣花)을 들여다보면 자갈색의 속살이 자연의 색깔을 그대로 옮겨온 듯하다.

더덕은 향기로 자신을 알린다. 바람 한 줄기가 코끝을 간질이고 지날 때 눈 밝게 뜨고, 코 평수를 넓힌다. 바람이 안내하는 데로 따라가다 보면 더덕이 울리는 종소리, 마음속 깊이 퍼지는 푸른 종소리를 만난다.

숲속에서 캔 뿌리 식물은 즉석 간식이었다. 귀두의 아랫부분에서 가로로 돌려 까기를 해야 허실이 적다. 손톱 밑에 진액이 묻어 찐득거리고 까매지지만 그게 대수랴. 도라지는 아려서 먹기가 거북했으나 더덕이나 잔대는 무난했다. 북어처럼 세로로 쪽쪽 찢어 먹으면 쌉싸름한 듯하면서도 달큼한 맛이 났다.

한방에서는 인삼(人蔘), 현삼(玄蔘), 고삼(苦蔘), 단삼(丹蔘), 사삼(沙蔘)의 다섯 가지를 모양이 비슷하고 약효도 비슷하다 하여 오삼(五蔘)으로 칭한다. 초롱꽃과에 속하는 잔대 뿌리를 사삼이라 하고, 또 일부에서는 더덕을 사삼・사엽삼(四葉蔘)이라고 한다.

베란다 화분에 더덕을 심었다. 늘어뜨린 줄을 잡고 사박사박 오르는 품새가 줄타기 선수 같다. 덩굴식물은 붙잡을 무언가를 의지하며 오른다. 왼쪽으로 감는 덩굴, 오른쪽으로 감는 덩굴이 있는데 대부분 식물은 오른손잡이처럼 오른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양손잡이가 있으니 바로 더덕이 그러하다.

예전에 어머니는 고추장 양념으로 더덕 무침을 해주었다. 더덕 요리에 고추장을 사용하는 것은 찬 성질에 뜨거운 성질을 넣어 조화를 맞춰주는 것이다. 잔뿌리가 많은 것은 말렸다가 물을 끓였다. 대추를 넣어서 끓이면 차로써 손색이 없다. 감기 기운이 있을 때는 생강을 넣어 끓이면 그만이다. 굵은 더덕은 담금주를 했다. '장가를 두 번 가는 것보다 더덕주 한 잔이 더 좋다'는 옛말이 있을 정도로 더덕은 알코올 성분을 만나면 효능이 높아진다니 참고할 만하다.

더덕을 고치에 꿰어 산적을 만들었다. 찬 성질을 완화하기 위해 쇠고기와 새송이를 부재료로 준비했다. 더덕은 기름장에 재우고 쇠고기는 밑간했다. 자투리 더덕을 썰어 탁주에 띄웠다. 으음, 고향의 맛이다.

노정희 요리연구가

Tip: 더덕은 폐 기능에 좋은 식품이다. 반면 찬 성질을 가졌기에 설사하거나 소화가 잘 안 될 때는 주의한다. 벌레에 물렸을 때, 종기가 생겼을 때 바르면 상처를 완화하는 작용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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