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진 씨가 박물관에 사는 이유

입력 2019-05-20 18:00:00 수정 2019-05-20 22:2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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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만 점의 골동품과 함께 사는 최순진 씨. 박노익 선임기자 noik@imaeil.com
수 만 점의 골동품과 함께 사는 최순진 씨. 박노익 선임기자 noik@imaeil.com

집 안팎으로 수많은 골동품을 쌓아두고 사는 한 남자가 있다. 그는 가난했던 유년기와 파란만장했던 시절을 위로받으려 골동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수만 개가 넘었고 그것들은 값어치를 산정하기도 어려울 정도이다. 자신만의 박물관에 사는 남자 최순진(63) 씨는 소장 중인 골동품을 보면서 "인간의 욕심으로 채워진 물건이지만 이것들은 오히려 제 마음을 비우게 만들었습니다."라고 말한다. 온 집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물건들과 이들의 주인 최 씨에게는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나만의 박물관을 세운 이유

"우리 집에 있는 골동품이 진품인지 가품인지도 모릅니다. 정확한 가격이나 얼마나 가치있는 물건인지도 몰라요. 파는 사람이 삼백만 원을 달라고 해도 내가 보기에 오십만 원짜리면 그만큼만 주고 사오기도 하고, 제 눈에 보물처럼 보이면 천만 원에 사 온 찬합장도 있습니다."

최순진(63) 씨는 셀 수도 없는 골동품 속에 묻혀 살고 있다. 골동품뿐만 아니라 미술, 조각, 외국 작품 등 수 만 개로 추정하는 그의 물건은 일곱 개의 방과 100평 규모의 창고를 가득 채우고 있다. 조선시대 수문을 지키던 위병이 들고 있던 무기, 반짝이는 칠기장과 목재 가구들, 옥으로 만든 화식(華式) 입상부터 스핑크스 동상까지 나란히 전시하기엔 생뚱맞은 물건들도 빼곡히 자릴 잡으니 나름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최 씨는 스스로 물욕(物慾)이 있는 편이었다고 말한다. 어린 시절, 그가 태어난 경상북도 군위 우보면에서는 형편이 좋은 집안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모두가 가난했다. 그 중에도 최 씨의 가족은 더욱 어렵게 살았다. 부모님은 영정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 정도로 어려웠다.

"부자를 부러워 한 게 아니라 제 때 끼니를 챙겨 먹는 사람을 부러워하며 자랐습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돈이 되겠다 싶은 물건을 사기 시작했어요. 처음엔 일찍 떠난 부모님을 떠올리는 물건들을 모았고 나중에는 집 안 빈 공간을 보면 채워 넣어야겠다는 욕심으로 골동품을 수집했습니다." 그래서일까? 수 백 종류의 골동품 속에서 그가 가장 아끼는 소장품은 나무로 만든 부엌 찬장이다. 어릴 때부터 먹을 것을 가득 채워놓고 사는 것이 평생 꿈이었다. 풍족하게 지내는 지금까지도 오랜 소망을 간직한 찬장을 가장 소중하게 여긴다.

최순진 씨가 가장 아끼는 골동품인 부엌 찬장. 박노익 선임기자 noik@imaeil.com
최순진 씨가 가장 아끼는 골동품인 부엌 찬장. 박노익 선임기자 noik@imaeil.com

◆실패한 인생은 없다

다행히 배운 것이 없어도 열심히 일하고, 무엇이든 도전할 수 있는 시대를 살았다. 최 씨는 일찍이 집 안의 가장이 되어 공장 노동자에서부터 가구공장 기술직, 중고 전자제품을 파는 일까지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 다 해보았다. 서글서글한 인상과 붙임성 있는 말주변은 전자제품 등 영업직에서 자신의 재능이 빛났다.

다니는 회사마다 실적 상위권을 차지하면서 타고난 세일즈맨으로 인정받았다. 사업가로써의 면모도 발휘했고 반대로 여러 번 실패도 있었다. 동업자에 크게 실망하거나 회사가 송사에 휘말려 신용불량자가 되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그에게는 좋은 자산이 되었다.

처음부터 바닥에서 시작해 일군 재산이었기 때문에 언제든지 노력하면 재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사업이 어려워 질 때도 남에게 진 빚은 반드시 갚았다. 최악의 상황이 오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스스로 먹고 사는 일은 문제가 아니었다.

최 씨는 현재 거주 중인 집으로 이사 하면서 또 다른 전환기를 맞이한다. 지금 살고 있는 팔공산 중턱에 위치한 양옥집 또한 건축 골동품이다. 70년대 지어진 이곳은 못질 하나 없는 마감처리에 정원이나 현관의 돌은 자연석을 석공이 직접 깎아 만든 고급 주택이다. 한반도를 형상화한 인공연못과 삼나무, 향나무, 대나무 등이 들어차있는 정원은 당시 집을 지은 이가 상당한 재력가임을 짐작케 한다.

"여긴 개성에서 인삼밭을 하던 어르신이 한국전쟁 때 대구로 피난 내려와 지은 집입니다. 터가 좋기로 유명했다는데 동시에 땅의 기운이 너무 세서 오래 버티는 사람이 없다고도 해요. 여기서 살아남으면 크게 흥하고 그러지 못하면 떠나야 하는 거죠. 바로 옆에 사시던 전직 대통령도 이사 나갔고, 예전 이 집에 살던 가족도 파산해 여길 떠났습니다." 이 집을 지은 재력가는 90년대 당시 수백억 원대 재산을 모두 탕진해 결국 집을 경매로 내놓았다.

최 씨는 오기가 생겼다. 항상 월세 집을 떠돌던 그가 마음먹고 마련한 집이다. 월세 보증금 200만원이 없어 깎아 달라 사정한 적도 있었고, 사업을 할 때도 매번 자리를 비워달라는 얘기가 나올까 노심초사하면서 20년을 보냈다. 힘든 시절을 떠올리며 이 집 만큼은 정복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땅의 기운을 다스리려면 사람이 드나들거나 물건으로 채워 기를 눌러줘야 한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골동품을 더 모으기 시작했고 방방이 묵직한 세월의 숨결을 머금은 물건들로 채웠다. 사람이 드나들도록 하기 위해 식당도 열었다. 진귀한 물건들, 명당 주택을 더 많은 사람들이 경험해 기운을 나누길 위함이다.

최순진의 백 년 넘은 축음기는 여전히 잘 작동된다. 박노익 선임기자 noik@imaeil.com
최순진의 백 년 넘은 축음기는 여전히 잘 작동된다. 박노익 선임기자 noik@imaeil.com

◆삶 그 자체가 교훈

확실히 기가 센 집이었던 것일까? 최 씨는 이사 후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다. 경매로 산 집이라 전 주인과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고 다른 송사에 휘말려 최근까지 법정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가난했던 과거와 멀어지고, 남부럽지 않을 만큼 여유가 생겼다고 생각했지만 욕심은 더해질수록 문제를 만들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최 씨는 식당을 열면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식당에서 판매할 소를 도축하고 남은 뼈를 고아 노인복지회관의 어르신이나 길거리 노숙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좋은 일을 하면서 머리를 식힐 요량으로 시작한 일이지만 마음의 위안이 되었다.

급식봉사가 해를 거듭하면서 그는 비로소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대한 답을 찾았다. "어렵게 보낸 유년기부터 다사다난했던 시절을 지나 먹고 살만해진 지금까지 모든 순간이 교훈인 것 같습니다. 지금은 큰 욕심도 없습니다. 제가 일군 것이 있다면 여생을 사람들과 나누고 살 계획입니다. 터가 좋은 집이 확실한가 봐요. 제게 가장 중요한 걸 여기서 깨달았습니다."

최순진 씨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사업을 하면서 사기를 당해 극단적인 생각을 한 적도 있고, 자릴 비켜달라는 땅 주인 눈치를 보면서 자산을 일구었다. 가난한 집에서 부족하게 자랐기 때문에 물욕이 있었지만 어느 순간 내려놓고 사는 것도 잘 사는 거란 사실을 깨달았다.

최 씨는 운영하는 가게도 위탁할 생각이다. 아들이 있지만 그는 아버지의 사업이나 재산에 관심이 없다고 한다. 그는 가지고 있는 골동품이나 집의 가치를 알아보고 잘 활용할 사람이 있다면 얼마든지 사용을 허락하려 한다. "물건 욕심에 가치도 모르는 골동품을 수집했어요. 분명히 좋은 물건, 더 많은 사람과 나누어야 할 것도 있을 텐데 저는 가치를 매길 줄 모릅니다. 가게를 맡기고 월세 받으면서 그 돈으로 봉사하며 여생을 보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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