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영의 근대문학을 읽다] '무정'의 이형식이 결혼에 성공한 이유

입력 2019-05-16 16:27:47

정혜영 대구대학교 인문교양대학 초빙교수

이광수 _무정_ 1회(매일신보, 1917. 1. 1.)
이광수 _무정_ 1회(매일신보, 1917. 1. 1.)

이광수 '무정'(1917)은 신데렐라이야기이다. 통용되는 신데렐라 이야기와 다른 점이 있다면 신데렐라가 여자가 아니라 남자라는 점이다. '무정'의 주인공 이형식은 가난한 고학생 출신에, 외모 역시 보잘 것 없다. 그런 이형식이 어느 날 갑자기 조선의 권력자 중 한 사람인 김장로의 사위로 낙점된다. 그렇다고 김장로의 딸 김선형이 남다른 결함이 있는 것도 아니다. 김선형은 미인으로 진명여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재원이다. 이 정도면 분명히 이형식은 남자 신데렐라이다.

물론 이형식이 가진 능력이 하나 있기는 하다. 고학으로 도쿄 유학을 마친 엘리트에 순수하고도 빛나는 이상을 지녔다는 점이다. 그러나 조선인들에게는 취업 기회가 거의 주어지지 않던 1910년대 말 식민지 조선에서, 인문학을 전공한 도쿄 유학생 타이틀로 손에 죌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이형식의 조건은 조선의 권력자인 김장로의 사위로 낙점받기에는 턱 없이 부족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형식이 아름다운 아내, 부유한 처가, 미국유학 기회까지 한 번에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김장로의 귀하디귀한 무남독녀 선형의 출생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선형은 김장로와 기생 부용 사이에서 난 딸이다. 물론 본처가 죽고 난 후, 김장로가 기생 부용을 정식 아내로 맞기는 하지만 기생이라는 부용의 전력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말인즉, 선형은 기생의 딸이었던 것이다. 철저한 신분사회였던 전통적 조선에서 기생의 딸은 기생이 되거나, 첩이 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새로운 세상이 오지 않는 한 그들의 삶은 변할 리가 없었다. '무정'이 발표된 1917년은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있었지만 전통적 관습이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던 때였다. 변혁이 시작되었지만 속도는 더뎠다.

기생의 딸이었던 소설가 김명순이 1914년 일본 육사 생도 이응준으로부터 데이트 강간을 당했을 때, 조선사회는 모든 책임을 김명순의 '부정한 혈액' 탓으로 돌렸다. 1910년대 조선에서 기생은 여전히 '춘정을 파는 아름다운 동물'이었고, 기생의 딸 은 어미의 '나쁜 피'를 물려받은 부정한 동물이었다. 이런 사회에서 김선형이 제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기생의 딸이라는 신분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낙인은 아버지 김장로의 권력과 돈으로도 없앨 수 없는 것이었다. 김장로가 가진 것 하나 없는 이형식을 사위로 결정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형식이 결혼에 성공하여 신데렐라가 되는 그 지점에서 '무정'이 지향하는 새로운 세계의 문이 비로소 조금씩 열리기 시작한다. 그 세계는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곳이다. 선형과의 결혼으로 그녀 신분의 한계까지 짊어지게 된 이형식으로서는 자신 뿐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해서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열어야 하는 것이었다. 시대의 그늘이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최초의 근대소설 '무정'에 주어진 사명이었다. 대구대학교 인문교양대학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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