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동 시대와 미술]대구화단의 추상화 과정

입력 2019-05-09 10:13:26

장석수 작
장석수 작 '무제', 캔버스에 유채, 204x154cm, 1965년

1953년 휴전협정으로 전쟁은 끝났으나 물자난으로 인한 생활고는 극심했다. 하물며 그림물감이나 화구재료야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그런 와중에도 예술가들의 창작적 열정은 식지 않아서 전시회는 이어졌고 오히려 전쟁 이전보다 작품발표의 열기는 더 뜨거웠다. 강우문, 정점식, 변종하 등의 개인전이 있었고 함대정, 박동현, 이정구 제씨의 양화 개인전과 3.1 기념전, 6.25 종군작품전, 미국문화원 5주년 기념전 및 제3회 '대구화우회' 전까지 그야말로 전전을 능가하는 많은 전시가 이루어졌다고 화가 백락종은 '문화계 회고와 전망'에 썼다. (영남일보 12월 30일)

그는 전쟁을 겪고 난 대구화단에 일어난 변화를 크게 두 가지로 꼽았다. "비자연주의적 회화의 진출이 자연주의적 매너리즘이라고 부르는 사진적 사실주의 회화를 작년보다 더욱 힘차게 몰아내었다는 것과 중앙화단이 내려와 지방화단과의 교류가 활발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비자연주의'를 "회화사적 시대조류와 진보적인 조형 정신"으로 보고 현대미술이 숙명적으로 계승해야 할 일로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을 "표현상의 허영과 무자각한 부화뇌동식의 망동으로써 피상적인 모방은 삼가야 하며 어디까지나 창조의 고뇌와 진지한 노력이 개재해야만 된다"고 일갈했다.

1955년 4월에는 이중섭의 대구전과 장석수의 개인전이 연이어 열렸다. 특히 장석수는 '광녀'에서 표현주의 화풍이 분명했는데 그로부터 3년 뒤 1958년 '조선일보 현대미술전'에 초대된 작품 '사정'(射程)은 격정적인 추상화로 바뀌었다. 화면에는 뿌리고 부은 듯 보이는 물감 자국만 남아있어 마치 전쟁터 같다. 화면 위에 얼룩과 두터운 마티엘은 미국의 액션페인팅이나 다른 추상표현주의 보다 유럽의 엥포르멜 작품의 영향이 크다. 비대상 추상작품의 전형을 성취했다. 당시 한국현대미술을 선도하던 조선일보 현대미술전에는 정점식, 서석규, 이복 등도 함께 초대됐는데 이들에 의해 대구화단의 추상화 경향은 더욱 확고해졌다.

그러나 대구미술가협회를 결성해 같은 목소리를 내던 작가들 가운데 정점식을 비롯한 일부가 경북미술가협회를 따로 조직하자 장석수는 그 동기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들의 창립전 작품들도 "묘사적이며 우리 생활의 현실을 보여주는 사상도 비판 정신도 없을뿐더러 그 조형화조차 모호하다." 했다. 그는 혼자서 추상 의지를 더욱 가혹하게 몰아세워 1960에 접어들면서는 독자적인 자신의 방법을 개발해 전혀 새로운 화면으로 차별화했다. 회화가 내용 대신 방법을 추구하고 붓의 기능을 신체적 행위로까지 확대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던 시대였다. 재료도 방법도 획기적이지 않은 면이 없다.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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