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동 미술평론가

일본이 패전의 수렁에서 금방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건 순전히 한국전쟁 덕이었다고 한다. 전쟁물자의 중간 공급지 역할을 하면서 이웃 나라의 참극이 경제발전 추구의 기회였다니. 6.25는 한반도를 초토화로 만들었으나 대구는 건재했다. 폭격으로 인한 파괴도 없었고 적 점령도 없어서 오히려 문화적 르네상스를 맞았다고 하면 그 역시 아이러니다.
6.25 후 대구에는 금달래가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도 해방공간에도 있었다 한다. 미치지 않고서야 버텨낼 수 없었던 사람들이 분명 있었다. 누군가의 비극적 삶의 이야기들이 덧씌워져 전형적인 한 인물을 만들어 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실제 인물이었고 또한 시대가 만든 비극의 상징이기도 하다.
'광녀'는 장석수선생의 1955년 작이다. 그해 4월에 대구 USIS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고 뒤이어 서울 동화화랑에서 이동전을 했다. 최해룡이 쓴 팸플릿 서문에는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며 오직 매너리즘에서 벗어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려고 묵묵히 정진을 계속해온 성실의 화우"라고 소개했다. 4월 2일자 매일신문은 신명여고 미술실로 전시 준비 중인 선생을 찾아가 취재했는데 "영양실조의 해쓱한 얼굴에 안광은 창작의 정열로 생기를 발하며 텁수룩한 수염은 세잔느의 풍모를 하고, 물체에 파고드는 진격성을" 지녔다고 전했다.
출품작은 '가족' 외 30여점의 유화로 특히 '광녀'와 신명학교를 그린 '교사'에서 보듯 표현주의의 화풍이 명백해졌다. 베니어 판 위에 거칠게 두터운 마티에르로 그린 이 초상은 전쟁을 겪고 난 우리 사회의 시대적 리얼리티를 증언하는 거의 유일한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55년은 장석수, 정점식, 서석규, 이복 등이 함께 기존의 대구화단에 저항하며 대구미술가협회를 결성한 해이기도 하다.
장석수 선생은 1921년 경북 양포의 부농 집안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릴 때 홍역을 앓고 한쪽 청력에 장애를 입었다. 고향의 장기초교를 다니고 대구 교남학교로 진학했다가 둘째 형(영남대 장기동교수)이 와세다 대학 영문학부에 유학하고 있어서 그도 교토 동산중학교로 갔다. 1940년 태평양미술학교에 들어가 유화를 전공하고 1943년 10월 귀국했다. 1944년 고향에서 제23회 조선미전에 출품했다. 이후 1949년 제1회 국전에 '신생'으로 한차례 입선을 한 후 관전은 멀리했다.
해방 이듬해 대구여중 미술교사로 나오면서 삼덕동 한 적산가옥을 살림집으로 마련 작업실을 겸해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대륜중, 경북대 사대부고, 경상중을 거쳐 1954년부터 신명학교에 근무했다.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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