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 족보

입력 2019-04-05 06:30:00

조향래 논설위원
조향래 논설위원

2015년 겨울 개봉한 세태 풍자 범죄영화 '내부자들'에는 빽(?) 없고 족보가 없어 늘 승진에서 밀리지만, 야심 있는 검사가 등장한다. 여기서 '족보'란 일류 대학을 나와 검찰 내 인맥이 튼튼한 경우를 말할 것이다. 그러나 족보(族譜)란 원래 한 가문의 계통과 혈연관계를 부계(父系) 중심으로 정리한 도표 형식의 책을 이른다.

가문의 단합과 조상에 대한 공경이라는 유교적 가족관을 바탕으로 제작한 것이어서 신분 사회에서는 족보가 생명줄이나 다름없었다. 항렬과 촌수를 따지는 것도 족보 문화의 한 전형이다. 왕조시대의 족보는 왕족이나 귀족 등 극소수 집안의 전유물이었다. 조선 초기만 해도 족보를 가진 양반의 수는 겨우 몇%에 불과했다.

그런데 임진왜란 후 사회 혼란과 세수 부족으로 공명첩이나 납속책 등을 통해 평민과 천민들이 대거 성씨와 족보에 편입되면서, 나중에는 양반의 후손 아닌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니 '족보가 무슨 소용인가. 언행이 반듯하면 양반이고, 하는 짓이 개차반이면 상놈이지'라는 비아냥까지 나왔던 것이다.

아무튼 해방 후 1960, 70년대까지만 해도 농촌 사회에는 족보를 따지는 풍습이 남아있어서 성씨와 가문의 귀천을 따지는 문화가 없지 않았다. 명문가의 족보를 둔 것만으로도 이른바 '금수저'가 될 수 있었던 시대에 대한 향수이거나, '족보 없고 근본 없는 사람'도 돈만 있으면 행세를 하는 세태에 대한 상실감의 반영일 수도 있겠다.

이제는 가문을 따지는 사람도 드물고 친인척이 모일 일도 잘 없으니 족보는 일상 속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족보가 대접받는 시대가 다시 올 일은 없을 듯하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이 족보 타령을 하는 바람에 족보가 새삼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문 대통령이 최근 청와대에서 열린 한 간담회에서 "'소주성'(소득주도성장)이란 말은 세계적으로 족보 있는 이야기"라고 발언한 게 그 발단이다. '소주성'을 비판하는 많은 국민들은 '소주성'을 오히려 '족보가 없는 경제적 망상이자 도박'이라고 폄하한다. 설령 '소주성'이 족보가 있다한들 경제적 현실과 맞지 않으면 그게 무슨 소용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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