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보호·학생선도' 학교장 폭넓은 재량권 보장

입력 2019-03-20 06:30:00

'징계처분 취소소송' 10건 중 9건 원고 패소·1건은 재판 진행

지난해 가해학생 측이 학교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 가운데 1심 결과가 나온 소송 4건과 1·2심에서 결과가 뒤집힌 2017년 소송 1건의 판결문을 분석한 결과, 재판부는 보호자와 학생의 반성 태도, 학교 측의 조치 사항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학교장에게 폭넓은 재량권을 보장하는 경향을 보였다.

법원이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이하 학폭위) 처분에 대해 가해 학생에 대한 '제재' 성격보다 '교육적' 성격에 방점을 찍는 경우가 많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재판부 보호자와 학생의 반성 태도, 학교 측의 조치 종합 고려

2017년 12월 대구 달서구 한 중학교에서는 2학년 여학생이 같은 반 학생을 '설명충'이라고 놀려 학폭위가 열렸다. 가해 학생은 서면사과와 교내봉사 5일(10시간), 특별교육 이수 2일 처분을 받았다.

이에 가해학생 측은 "학교가 사실관계 확인을 게을리했다"며 소송을 냈으나, 재판부는 오히려 가해 학생과 그 부모의 태도를 문제 삼았다.

재판부는 "가해 학생 부모가 '친구들 간의 사소한 문제를 학폭위로 해결하려는 상대방 부모의 비합리적 사고방식이 당혹스럽고 이해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기 자식만 두둔한 점은 문제가 많다"며 "결국 학교폭력 신고로 맞대응하는 등 진정으로 반성하거나 사과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며 원고의 청구를 기각했다.

서로 피해를 보았다고 주장하는 두 학생 간의 다툼으로 누가 가해자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은 사건에 대해서는 재판부가 학교가 얼마나 노력을 기울였는지에 따라 적법 여부를 가렸다.

대구 동구 한 중학교는 2017년 11월쯤 수업시간에 장난을 치다 서로 싸움이 난 두 학생에게 각각 심리상담 및 조언과 특별교육 이수 처분을 내렸다.

그러나 한 학생의 부모가 "상대방 학생이 지속해서 언어폭력 및 집단따돌림을 가해왔지만 동일한 학폭위 처분에 따라 가해 학생으로 낙인찍혔고, 진학에 지장을 받게 됐다"고 소송을 냈다.

누군가의 잘잘못을 가리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재판부는 학교 측이 사실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한 점을 들어 원고의 청구를 모두 기각했다.

재판부는 "학교는 서로를 화해시키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나 서로 억울함만을 호소하면서 화해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학교 측 처분이 적법하다고 판단했다.

◆'학생 미래', 재판부가 가장 고심하는 요소

상급 학교 진학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학폭위 처분은 어린 학생들의 미래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2017년 1심 재판부와 항소심 재판부는 한 중학교 여학생의 장래를 두고 정반대의 엇갈리는 판결을 내놨다.

2016년 10월 22일 대구 수성구 한 중학교에서 같은 반 29명의 학생들이 특정 학생을 SNS 단체 채팅방에 초대해 다량의 비난 메시지를 쏟아낸 사건이 발생했다.

큰 충격을 받은 피해 학생의 부모가 이를 학교에 알리자 학교는 이를 '사이버 언어폭력'으로 보고 가해 정도에 따라 학생들에게 서면사과, 학교 봉사 10시간, 특별교육 이수 2시간, 보호자 교육 2시간 등의 조치를 내렸다. 그러나 이 중 한 학생이 학교의 처분에 반발해 소송을 제기했다.

1심 재판부는 원고가 단체대화방에 올린 메시지 자체가 가지는 폭력성의 정도가 그리 심하지 않다는 점을 들어 학교 측 처분이 지나치게 가혹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무엇보다 원고 학생의 장래를 걱정했다. 소송을 제기한 학생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영재학급 교육과정을 수료하는 등 수학·과학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피해 학생이 정신적 고통으로 한동안 학교에 갈 수 없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고의성과 심각성이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다"며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원고의 청구를 모두 기각해 결과를 뒤집었다.

재판부는 "설령 고교 진학 과정에서 일부 불이익을 입을 가능성이 있더라도 그보다는 이 사건 처분으로 달성하려는 공익, 즉 피해 학생의 인권 보호, 가해 학생들의 선도·교육을 통한 건전한 사회구성원으로의 육성 등이 훨씬 중대하다"고 강조했다. 다만 "중학교 졸업과 동시에 처분 기록이 삭제되는 등 원고의 불이익은 최소화한다"고 판결 이유를 덧붙였다.

◆법원 까다로운 판단, 세밀한 절차적 하자 추궁하는 학부모들

이처럼 법원이 학교 측 처분이 적절하다고 판단하는 사례가 늘어나자 일부 학부모와 변호사들은 학교 행정 절차상 지엽적인 하자를 파고드는 추세다.

2015년 포항 한 교육재단 소속 초등학교에 다니던 한 2학년 학생은 같은 반 친구와 다툼을 벌여 학급 교체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반면 같이 다툼을 벌인 친구는 서면 사과라는 경미한 처분을 받자 중징계를 받은 아이의 부모가 소송을 제기했다.

1심에서 패소한 학부모는 2심에서는 절차적 하자를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징계서에 학교장 직인이 날인되지 않은 데다, 학폭위 구성 자체가 적법 절차를 준수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제기한 것.

결국 사건을 심리한 재판부는 사건 내용과 상관없이 학폭위 구성 절차가 적법하지 않다며 해당 처분을 취소시켰다. 학교폭력예방법은 '학폭위 전체 위원의 과반수를 학부모전체회의에서 직접 선출된 학부모 대표로 위촉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당시 이 규정을 어겼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절차에 따라 위원 구성이 이뤄지지 않은 하자가 있는 처분이었다. 사건 처분이 무효인 이상 원고의 나머지 주장에 대해서는 판단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학폭위 제도 개선과 가정·부모 역할 중요

지역 한 변호사는 "대구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서울과 수도권 등의 지역은 학폭위 위원들의 평소 성향과 친소관계까지 재판의 증거로 제출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학부모들이 학교의 사소한 잘못 하나하나에도 트집을 잡다 보니 학폭위 업무는 교사들에게도 곤욕스러운 업무 중 하나다. 민감한 학부모 사이에 놓인 학교들은 교육청이 마련한 가이드라인에만 의존한 채 엄격하게 사건을 처리할 수밖에 없어 교육 목적은 아예 뒷전으로 밀린다고 입을 모은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 학폭위에 대한 제도적 개선책 마련은 물론 무엇보다 가정에서 부모들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대구시교육청 고문변호사로 활동하는 김희찬 변호사는 "학폭위 처분은 처벌이 아니라 가해 학생에 대한 교육과 피해 학생에 대한 적절한 보호를 목적으로 한다. 마치 형사사건처럼 접근한다면 잘못된 접근법"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4년간 대구시 학교폭력대책지역위원회에서 청소년 상담 전문가로 활동해온 이선자 한국복지사이버대학 청소년복지상담학과 교수는 "상담과정에서 아이들은 친구와 화해하고 싶은데 부모님 때문에 망설이는 경우를 많이 봤다"며 "부모의 욕심이 아니라 아이가 원하는 방향대로 결정하는 것이 가장 자녀를 위한 길이며, 학폭위 개최나 불복 소송을 제기하기 전에 자녀와 충분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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