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병주교수의 역사와의 대화]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이상룡과 이회영

입력 2019-03-11 19:30:00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현... 이상룡, 이회영 닮은꼴
임청각과 우당기념관... 3.1절 100주년의 해에 찾아가 보는 것도 의미있어.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어린 시절을 안동에서 보낸 필자는 낙동강변에 위치한 고가 임청각에 대한 기억이 또렷하다. 아버님과 아침 일찍 집 근처 영남산을 등산하고 내려오는 길에 눈에 들어온 유적이 임청각과 신세동 칠층전탑이었다.

당시는 이 유적들이 가지는 의미를 전혀 알지 못했다. 다만 이들 유적이 철로변에 너무 가까이 있어 기차의 우렁찬 기적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선명하다. 훗날 임청각을 가르고 중앙선 철도가 생긴 것은 일제의 만행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1858~1932) 선생의 고택 임청각은 독립운동가를 대거 배출한 곳으로 유명하다. 2018년 광복절에 이상룡의 손자며느리 허은 여사가, 올해 3·1절에는 부인 김우락 여사가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돼 임청각 출신 독립유공자는 11명이 되었다.

임청각 외에도 안동 지역에서는 369명의 독립운동가가 배출돼 그야말로 '독립운동의 성지'가 되었다. 김동삼, 이육사 등이 안동 출신의 대표적 독립운동가다. 의성 김씨 종택이 있는 내앞마을 인근에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이 건립된 것도 이러한 역사성에 근거를 두고 있다.

전 재산 처분 독립운동에 몸 바쳐

이상룡은 1910년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자 서간도로 망명하여 이회영, 이시영 등 동지들과 함께 경학사를 조직하고 신흥강습소를 설립했다.

경학사는 서간도 이주민을 위해 농업 등 실업과 교육을 장려하고 장차 군사훈련을 시키기 위한 조직이었다. 1912년에는 애국계몽 단체인 부민단을 조직해 단장이 되었으며 1919년 한족회를 조직하고, 서로군정서 조직에 참여해 독판(督辦)으로 활약했다. 1926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이 되어 생애를 마칠 때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됐다.

최근 서울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서촌에는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1867~1932)의 흔적을 볼 수 있는 우당기념관이 있다.

이회영은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의 4남으로 태어났다. 일찍부터 관직을 포기하고 항일운동에 생애를 바쳤다. 1896년부터 의병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황해도 인삼포를 경영했으며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늑약을 주도한 이완용 등 을사오적의 암살을 준비했다.

1906년 부친 사망 후 집안 노비들을 모두 해방시켰는데 이상룡의 모습과도 일치한다. 1910년 한일강제병탄 뒤 서울 명동 일대의 전 재산을 처분한 후 온 가족을 이끌고 서간도로 거처를 옮겼다. 보다 체계적인 독립운동을 위해서였다. 이상룡과 더불어 경학사 설립이나 신흥무관학교 설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11년 6월 서간도 유하현의 허름한 옥수수 창고에서 신흥강습소 개소식이 있었다. 독립에 필요한 무장 군사력을 기르려는 목적이 컸다. 신흥강습소는 1919년 5월 류허현 고산자로 본부를 옮기면서 신흥무관학교로 명칭을 바꾸었다.

임청각·우당기념관 구국의 숨결

1913년에는 국내로 잠입하여 독립 자금 모금 활동을 했으며 고종의 국외 망명을 추진했다. 1924년에는 항일무장 투쟁을 위해 의열단 조직을 적극 후원하고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으로 아나키스트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1930년대에 이르러서도 항일 무장투쟁에 적극 나섰지만 1932년 일경에 체포된 후 모진 고문 끝에 순국하였다.

이상룡과 이회영은 일제에 의해 국권이 피탈된 국난의 시기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전 재산을 처분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한 두 분의 자취가 잘 남아 있는 임청각과 우당기념관 등 역사 유적지를 찾아볼 것을 권한다.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올해라서 더욱 뜻깊은 경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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