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쇠달인'...로봇도 못따라오는 손재주 가진 2대 대표 김건식씨


열쇠는 문이나 금고를 열거나 행운·행복의 열쇠, 성공의 열쇠 등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다. 때론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말로도 쓰인다. 뿐만 아니라 주부에게 열쇠란 가정에서 공식적으로 시어머니 뒤를 이어 집안 살림을 위임 받는다는 뜻도 담고 있다. 이처럼 열쇠는 단순히 문을 열고, 상자를 열고, 대문을 여는 것을 넘어 앞날에 대한 희망을 상징하기도 한다. '죽도열쇠'(경북 포항시 북구 죽도동)는 70여 년, 2대에 걸쳐 이어져 오고 있는 노포이다. 2대 김건식(55) 대표는 '열쇠'와 관련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뚝딱 해낸다.
◆ "무엇이든 열어드립니다"
2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는 김건식 대표는 25년차 열쇠공이다. 그의 작업실은 수백 가지의 재료와 제작기계, 드릴, 용접기 등으로 가득하다. 가게 앞에는 열쇠관련 연락이 오면 언제든지 주문자가 있는 곳으로 달려갈 수 있는 승합차가 세워져 있다.
"저는 일할 때 무조건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지금까지 못해준 것도 없었고요. 다른 열쇠집에서 못하면 제게로 달려옵니다. 하하하…"
요즘은 자동차키 분실에 따른 차키 제작이 많단다. "어떤 차든 빠르면 10분, 오래 걸려도 1시간이면 충분합니다."
김 대표는 열쇠집이 많이 없어졌다고 했다. 집집마다 열쇠 대신 디지털번호키를 달았고, 자동차 키도 스마트키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 대표는 열쇠집은 앞으로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 일에 '희망'을 가진다고 했다. "열쇠집이 사라질 거라고들 하지만 제 생각은 반대입니다. 열쇠 제작은 '기술'이니까. 로봇도 사람 손기술은 못 이기거든요. 그래서 틈만 나면 공부하고 연구합니다."
열쇠공으로 일하면서 궂은일도 많이 겪었다고 했다. "경찰서에서 전화가 와 형사와 같이 집문 따서 들어가보면 사람이 목매 죽어있는 걸 많이 마주했습니다. 그리고 대문 열어주다 부부싸움에 말려든 일, 절도사건 때 형사가 찾아와 알리바이를 꼬치꼬치 캐묻곤 하던 일 등등. 그래서 문을 함부로 열어주면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죠."
김 대표는 남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해낼 땐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손재주도 있고, 손이 빠른 편이라 일하는 속도도 빠르다. "열쇠 하는 사람 2명 와서 문고리를 못 따서 헤매고 있던 걸 저는 1시간 만에 해결했습니다."
◆ 아버지는 북한 인민군 장교
죽도열쇠 이야기는 긴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49년, 20대 초반 북한 인민군 장교 김흥준(1999년 작고)은 한국군에 귀순했다. 이념의 갈등 속에서 죽음을 무릅쓴 탈출이었다. 그는 곧 통일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북한에 남은 가족과의 상봉도 곧 이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산, 울산, 대구를 거쳐 포항에 정착해 터전을 잡았다. 그때 처음 시작한 직업이 열쇠공이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김흥준은 입대해 국군 장교로 전쟁에 참전했다. 금방 끝날 것 같았던 전쟁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장기전에 돌입했다. 김흥준은 전쟁 중 폭탄 파편이 폐에 박히는 부상을 입고 제대했다.
제대는 했지만 마땅히 할 것이 없었다. 전쟁 전에 하던 열쇠 수리공을 다시 시작했다. 손수레에 열쇠 수리에 필요한 재료와 장비, 그리고 각종 잡화 등을 싣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녔다. 김흥준은 당시 귀한 금고를 열 수 있을 정도로 손재주가 좋았고, 감각도 탁월해 인정을 받았다.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가정을 근근이 꾸려갈 수 있었다.
1982년, 10㎡도 안 되는 가게 '죽도열쇠'(현재 본점)를 차렸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하늘은 김흥준 편이 아니었다. 전쟁에서 입은 상처가 덧나 시간이 갈수록 악화됐다. 아내와 아이들을 포항에 남겨둔 채 혼자 제주도로 터전을 옮겼다. 그의 아들 2대 김건식 대표는 "아버지는 손재주가 남달랐고, 성실하고 신용이 있어 손님과 주위 분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1999년 어느 날, 하늘이 심술을 부렸다. 젊은 나이에 혈혈단신으로 사선을 넘었던 김흥준이 오토바이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늘 큰바위같이 든든하던 아버지의 죽음은 김 대표에겐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다. 자연스레 가업을 이어받았다.
◆ "가업 승계는 하늘의 뜻"
김 대표는 어려서부터 신문배달, 잔신부름 등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큰돈을 벌기 위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업에 뛰어들었다. 사업이 잘돼 열쇠도매상을 비롯해 주차장, 세차장, 식당 등 사업체도 여럿 운영했다. 그러나 1995년, 부도가 났다. 사람을 쉽게 믿었던 것이 불찰이었다. 은행 빚만 수십억원. 부도가 나자 아무도 그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지 않았다. "원 없이 돈을 써봐 후회는 없다. 다만 부모님께 죄송했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곧바로 평정심을 찾았다. 화려했던 지난 과거를 잊고 어린 시절 아버지 어깨너머로 배웠던 열쇠수리공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이전처럼 욕심도 부리지 않았다. 모두 자신의 부덕 때문이라며 열쇠를 다듬듯 생각을 다듬었다.
모두가 제자리를 찾아갈 무렵, 1999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김 대표는 열쇠공이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아버지의 뒤를 잇기로 결심했다. "평생 열쇠로 가업을 이어가라는 하늘의 뜻이라고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2008년 김 대표는 어머니와 함께 사업장을 꾸려가던 곳에서 떨어져 나와 새롭게 독립했다. 김 대표는 손재주만 믿고 안주하지 않았다. 쇠줄로 금속을 깎고 다듬고, 열쇠의 원리를 연구하면서 나름대로 열쇠에 대해 열심히 공부했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열쇠업 영역이 넓어졌다. 튼튼한 수동열쇠는 여전히 인기지만 새롭게 전자열쇠가 등장하면서 다양해졌다. 특히 자동차 열쇠가 판도를 변화시켰다. 전자키, 도어록, 디지털 도어록 등 열쇠는 모두 비슷비슷하다. 특히 구조 자체가 확대되면서 사업의 방향도 변화됐다. "열쇠는 아파트는 물론 기계, 선박, 자동차, 비행기까지 무궁무진하다"면서 "브랜드는 물론 차종에 따라 완벽하게 구색을 갖춰야 사업을 온전하게 꾸려갈 수 있고 경쟁력에서 앞설 수 있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한순간도 잊어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틈만 나면 공부하고 연구한다. "공부해 즐기며 일한다 싶으면 새로운 것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항상 긴장해야 합니다."
그래서 취미도 없다고 했다. "젊었을 때 당구, 골프 등 다 즐겨봤어요. 이제는 기계를 만지고 연구하는 게 취미"라고 했다.
김 대표는 아들에게 가업을 이으라고 강요하지는 않을 작정이다. "저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이 일을 계속할 것입니다만 가업 계승은 아들이 선택해야 할 몫"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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